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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테리어 어디까지 해봤니?

by 아름다움이란

어쩌다 카페 사장이 되었습니다.

내 인생의 선택지 안에 없었던 소상공인으로 살고 있지요.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풀어내려고요.

한 때 꼬마빌딩이 유행하던 시절이 있었어요. 그에 편승해 꼬마빌딩을 짓기 시작하여, 카페를 운영하는 일상을 공유하려 합니다.


13화 급조한 공간철학




나는 똥손이다.

스크린샷 2025-09-19 083356.png 출처 네이버

결혼 후 첫 이사를 앞두고 인테리어를 준비했다. 수많은 정보 속에서 원하는 스타일을 찾고, 결정하는 과정이 쉽지 않았다.


집인지 뉴욕의 아트 갤러리에 와 있는지 헷갈리게 하는 미드센츄리의 세련됨,

시간을 되돌려 유럽 귀족의 살롱을 연상케 하는 엔틱의 묵직함,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정리된 모던의 차가운 단정함,

모두 욕심이 났다.


포털사이트에서 인테리어를 검색하면서 셀프 인테리어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입이 떡 벌어질 만큼 손재주가 탁월한 제야의 고수들은 화장실 타일을 뜯어내 새로 붙이고, 마루를 갈아치우고, 가구까지 직접 제작하며 자신의 금손을 인증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란 사람은 도저히 넘볼 수 없는 성역과도 같아서 나는 모니터 안의 before와 after를 보며 침만 질질 흘렸다.



그들은 자신의 집을 뽐내면서, 따라 하고픈 사람들에게 진심을 다해, 어떤 보상도 바라지 않고 자신의 경험을 나누어주었다. 세상에는 정말 선하고 멋진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됐다. 그들의 실패담이 누군가의 성공을 이끌고, 아낌없이 감탄하고 칭찬하는 분위기는 진심으로 아름다웠다.


'나도 해볼까?' 하는 생각이 잠시 스쳤지만,

뭘 해도 설렁설렁, 대충대충 하는 똥손을 가졌다는 것을 아는 남편이

'니가?'라고 말하는 순간 깨끗하게 포기했다.

육체 노동과 스트레스를 돈과 바꾸는 것으로 결정했다.


턴키(Turn-Key), 인테리어판 패스트트랙이다.

‘열쇠(key)만 돌리면 모든 설비가 가동되는 상태로 인도한다’는 뜻에서 유래했으며, 설계·시공·운영을 한 업체가 책임지는 방식입니다.

업체를 찾아가서 견적을 받고 계약서에 싸인하면 끝인 줄 알았다. 처음엔 소음으로 인한 주민들의 민원을 고려하여 공고문을 부착하고 집집마다 찾아가서 양해를 구하는 일까지 알아서 척척해주니 역시 '돈이 좋다.'는 말이 절로 나오는 것은 딱 이때까지만이었다.


열쇠 돌릴 힘만 있으면 새집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그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철거 이후에는 모든 것이 선택과 결정의 연속이었다. 화장실과 주방의 타일, 싱크대 디자인과 색깔, 도배지, 수전, 샤워기와 변기까지 모든 결정은 나의 몫이었다.


두꺼운 카탈로그를 던져주며 "이 중 하나 골라 주세요." 하는데


'이럴 거면 내가 왜 맡겼냐고!'


다시는 이사도 인테리어도 하지 않으리라 맹세했다.


카페를 하기 위해 인테리어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 나의 맹세는 허공으로 사라졌다. 예산이 부족하고, 욕심은 넘쳐나던 그때 내 앞에 '셀프인테리어계의 금손'이 나타났다. 우리는 예산을 줄여야 했고, 그녀는 경험을 늘려야 했으니 이건 분명 하늘이 맺어준 인연이었다. 그녀는 우리의 간절한 기도를 어딘가에서 들은 신이 우리에게 보내 준 선물이 분명하다. 우리가 원하는 스타일을 3D로 뚝딱 그려냈고, 인테리어의 세계로 우리를 리드하며 귀와 눈이 트이도록 도와주었다. 시장조사를 함께 하며 자재를 직접 보고 만져보면서 리스트를 작성했고 전문가를 섭외해 일정을 조율했다.



이 사람 뭐가 되도 되겠어!

난 그때 그녀의 떡잎은 다르다는 것을 알아챘다. 역시 우리와 함께 작업한 지 2년 6개월이 지난 어느 날 유명인이 되어 TV에 출연했고, 자신의 지난 시간을 파노라마로 보여주는데 우리가 함께 했던 고난의 과정이 아주 잠시 스쳐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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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목과 재능을 가진 사람이 노력까지 하면 감당할 수 없다.



그녀와 함께하면서 나도 조금은 달라졌다. 타일공과 목수가 떠난 자리를 마무리하는 과정에서 이상한 뿌듯함을 맛본 것이다. 그건 단순한 노동이 아니었다. 나는 할 수 없다는 한계가 할 수 있다는 가능성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니체가 말한 위버멘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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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한계를 넘어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인간상. 나는 시멘트를 물에 개어 줄눈을 메우다가 니체를 만났다.

어쩌면 철학은 도서관 책상 위보다 작업장의 먼지 속에서 더 빛나는지도 모른다. 풍요로움 속에서는 절대 발현될 수 없는 힘, 결핍 속에서 솟아난 초능력이었다. 타일을 붙이고 페인트를 칠하며 땀과 먼지로 범벅이 되었지만 새로운 도전으로 얻은 만족감과 해보지 않은 일에 대한 두려움을 걷어낼 수 있었다.



지금의 나는 어떤 일이 주어졌을때 도망치지 않는다.

'일단 해보지 뭐.'

'우리가 한 번 해볼까?'라는 말이 일상이 되었다. 연장 들고 다녀보니 세상에 두려운 것이 조금 줄었다. 물론 결과물이 삐뚤빼뚤, 울퉁불퉁하면 어떤가. 그 속에는 고민과 땀과 열정의 스토리가 담겨있는데.


나는 아직 채워야 할 것이 많다. 지식, 지혜, 경험... 그리고 통장 잔고까지. 하지만 그 덕분에 나의 정신은 깨어났으니 결핍이 나에게 아주 멋진 선물을 해 준 것이다. 결핍은 우리를 불행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가능성의 문을 열어줄 수도 있다. 턴키(turn-key), 키를 돌려 문을 열면 새로운 곳이 펼쳐지지만 그것은 나의 환경이 바뀐 것이지 나를 바꾼 것이 아니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경험이 우리 안에 잠자던 젖 먹던 힘을 깨워줄 것이라 믿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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