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도 성장하는 중입니다.
어린 시절 사진첩 속에 기억나는 장면 하나.
5-6살쯤으로 보이는 나 그리고 함께 웃고 있는 사촌들의 모습이다.
사진 속의 장소나 옷차림을 봤을 땐 아마도 추석이 아니었을까 싶다.
돌아가신 할아버지 산소 앞에서 그 시절 그 장난기 가득한 꼬맹이들은 어깨동무를 하고 활짝 웃고 있다. 까르르 웃음소리가 사진 밖으로 들려오는 듯하여 그 시절의 추억 속으로 나를 되돌리곤 한다.
나의 아버지는 4남 3녀 중 막내다. 그래서 내 위로 사촌 언니와 오빠들이 많았다. 사람을 좋아하고, 북적이는 걸 좋아했던 나는 명절 전날 큰집에 모여 사촌들과 함께 뛰어노는 게 참 좋았다.
큰집은 너른 마당이 있는 시골의 주택이라 주변 어디든 뛰어다녀도 되고 오빠들이 장대로 밤나무에 밤을 털면 밤송이를 발로 밟아 밤을 줍기도 하고, 마을 어귀에 있는 성황당 나무 위로 기어올라 가기도 했다. 뒷산에 올라 한참 술래잡기를 하다가 배가 고프면 큰집 마당에 있는 큰 대추나무에 대추도 따먹고, 점빵이라고 불렀던 동네 작은 구멍가게에 달려가 과자를 사 먹곤 했다. 밤이 되면 옹기종기 모여 앉아 명절 특집 프로그램을 보는 재미도 좋았다.
그런데 초등학교 4-5학년이 되었을 무렵 늘 그랬듯 명절 전날 큰집에 갔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사촌들이 오지 않았다. 기다리다 지쳐 집안 어른들께 여쭤보니, 이제 언니 오빠들은 미리 오지 않고 명절 당일에 올 거라고 하셨다. 그땐 그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되지 않았지만, 어쨌든 사촌들이 모이지 않는다니 동생과 둘이 덩그러니 큰집 마당에서 심심해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 짐작해 보건대 가족 간의 크고 작은 다툼으로 소원해진 어른들 간의 관계도 한몫했던 듯하고, 이제 중, 고등학생이 된 언니 오빠들은 가끔 만나는 친척들 보단 본인들의 학업이나 친구관계가 더 중요해졌음을 언니 오빠들의 나이쯤이 되어 이해하게 되었다. 사촌들이 그러하건 말건 나와 내 동생은 명절 전날에 반드시 큰집에 가야 한다는 아빠의 명령에 어쩔 수 없이 한동안은 심심한 명절을 보냈고, 더 이상 술래잡기에 관심이 없는 훌쩍 자라 버린 언니 오빠들에게서 거리감도 느껴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학업, 직장을 핑계로 그마저도 모두 만나기 힘들어졌고, 그로부터 20년이 훌쩍 지나 우리가 모두 모인 곳은 할머니의 장례식장이었다.
온 동네를 뛰어다니며 술래잡기하고 간식 나눠먹고 놀던 그 시절 그 꼬맹이들은 각자 가정을 이루고, 한두 명쯤 아이를 키우고 사회에 나가 생활을 하는 제법 중년 티가 나는 어른이 되어있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어색하게 안부를 묻고, 각자 사는 이야기와 아이들 이야기를 나누었다. 변해버린 외모만큼이나 대화 주제도 많이 달라져 있었다.
할머니의 장례가 끝나고 헤어지며 언제 또 한 번 얼굴 보자며 인사를 나눠보지만, 우리는 그러지 않을 것임을 서로 안다. 같은 성씨를 쓰고,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맺어진 사람들이지만 각자의 삶 속에서 우리는 자주 만나는 친구보다 못한 서먹한 남이 되어가고 있었다.
진정한 가족의 의미란 뭘까? 꼭 같은 혈연관계에 속해있어야만 가족일까? 세상에 당연한 관계는 없는 듯하다. 그게 가족이라도 말이다. 각자의 삶 속에서 문득 안부를 묻고, 마음을 나누며 서로의 온기가 닿아있는 관계가 피는 섞이지 않았어도 가족의 또 다른 모습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