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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나들이 Feb 19. 2024

한라산 영실에서 만난 요정들

인생의 길에서 만난 사람들

1년 전부터 해오던 북한산 등산 모임에서  한라산 등반을 하기로 했다. 지난여름 폭염주의보가 내린 날, 몸에서 나올 수 있는 땀의 최대치를 확인하며 설악산 울산바위 올랐다. 첫째의 재롱에 산고를 잊은 채 둘째를 낳듯 한여름 울산바위절경에 반해 겨울 영실 탐방을 계획했다.


 새벽 6시 반쯤 한라산 영실코스 근처 주차장에 도착하니 불빛이라곤 달빛이 전부였다. 주차장에 차량 서너 대만 주차된 채 을씨년스러운 기운마저 감돌았다. 뭔가 이상한 예감이 들었지만 스패츠와 무릎 보호대를 차면서 산에 오를 채비를 하고 있었다. 그때 어떤 아저씨가 나타나 "영실 코스 가세요?"하고 물었다.


"여기서부터 걸어가면 영실코스 입구까지 40분을 더 걸어야 돼요. 저 위에 영실탐방로 주차장이 있어요. 거기에 주차하고 걸어가세요."

영실매표소에 막 도착해서

우리가 주차한 곳은 영실탐방로 입구가 아닌 영실탐방매표소였다. 먼저 말을 걸어 주고 길을 알려준 아저씨가 어찌나 고맙던지.


 모르는 길을 처음 갈 땐 두렵고 막막하다. 이 길이 맞는지 확신도 없고 앞도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럴 때 길을 먼저 가 본 사람이 안내해주면 큰 도움과 위안을 얻는다. 어디서부터 시작하는지, 어디서 험한 길이 끝나는지 듣고 있노라면 길 위의 요정을 만난 기분이다. 주차장의 아저씨는 우리의 첫 번째 길 위의 요정이 되었다.

병풍바위

조금 걷다 보니 눈 덮인 병풍바위 위로 하얀 빛줄기를 내뿜으며 말간 해가 떠올랐다. 묵직한 보랏빛이던 하늘이 경쾌한 파란빛으로 변했다. 파란 하늘 아래로 끝없이 늘어선 계단을 한 걸음씩 올라갔다. 파란 하늘과 어우러진 목재 계단, 식물군락들이 어우러져 절경을 이루었다. 뒤를 돌아봐도 둘러봐도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은 감탄사를 연발하게 했다.

병풍바위 앞 여인상이 보이시나요

 우리가 일산으로 처음 이사했을 때 부산에서 동서네 식구가 놀러 왔다. 같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으로 들어가는데 도련님이 조금 놀라서 물었다.

 "서울 사람들은 엘리베이터에서 서로 인사를 안합니꺼?"

도련님 말로는 부산에서는 엘리베이터에서 모르는 사람을 만나도 인사를 한다고 했다.

 다음 명절에 도련님 집에서 엘리베이터를 탔을 때 사람들을 유심히 살폈다. 도련님 말대로 모두 가벼운 미소를 띠며 "안녕하세요." 하고 자연스럽게 인사를 했다. 정감 있고 부드러운 온기가 순식간에 공간을 웠다.


  그 온기를 한라산에서 제대로 느끼게  되었다. 병풍 바위 옆으로 난 가파른 계단을 오르는 발걸음이 점점 무거워질 때쯤 내려가던 분들이 미소를 지으며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했다. 모르는 사람에게 듣는 "안녕하세요."가 이렇게 에너지를 주는 말이었다니. 인사를 들을 때마다 발걸음은 1g씩 가벼워졌다. 가파른 계단을 오를 때 1g 가벼워진 심리적 무게는 제법 차이가 컸다.


 산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받는 에너지는 힘으로 가득 차있다. 활기차다. 힘든 산길을 오르면서도 밝은 기운과 긍정적인 후광이 따라다닌다. 험한 길을 올라가더라도 마주치는 이들에게 미소와 에너지를 받는다면 힘들어도 기분이 좋을것 같다.


병풍바위 구간을 지나고 맞이한 고산평원은 선작지왓이었다. 파란 하늘 아래 소담하게 자리잡은 백록담 화구벽, 그리고 끝없이 펼쳐진 평원은 그저 감동을 선사했다.

백록담이 보이는 선작지왓
선작지왓과 닮은 노르망디 해변 에트르타의 해안절벽

5년 전 아이들과 떠난 프랑스 여행에서 들렀던 노르망디 해변도시 에트르타와 닮았다. 에트르타는 코끼리 바위와 작가 모리스 블랑이 집필한   '괴도 루팡'을 품고 있는 도시다. 에트르타의 해안 절벽 위의 풍경과 영실코스의 선작지왓은 일란성쌍둥이인 남편과 도련님처럼 닮았다. 겨울 한라산이 여름 에트르타의 평화로운 황금빛을 담아 왔다. 한라산에서 에트르타를 추억하며 제주에서 노르망디 해변까지 순간이동하고 있었다.  


 영실코스의 정상인 윗세오름에 올라 사진을 찍으며 소박한 한라산 등반을 기념했다.

 내려오는 길에 앞서 가던 선생님들이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는 게 보였다. 중학생으로 보이는 두 아들이 엄마, 아빠와 쉬고 있었는데 아이들이 힘들다고 불평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엄마, 아빠는 윗세오름에 가면 라면을 팔 거라고 올라가서 사 먹자고 아이들을 구슬렸다. 하지만 윗세오름에는 매점도 자판기도 없었다.


"위에 올라가면 아무것도 안 팔아요. 라면 없으면 저희가 이거 드릴게요."

 

선생님들이 가져간 라면애덮밥과 생수를 건넸다. 아이들에게 올라가서 먹으라며 파이팅을 외쳤다.


모르는 사람에게 말을 건다는 건 용기가 필요한 친절이다. 상대방이 나의 호의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는 상태에서 내밀어야 하는 손이라서 그렇다.


 인생이라는 산을 오르면서 도움을 주는 요정을 만나고 좋은 길벗과 함께라면 힘을 얻는다. 걸어가는 순간이 좋은 추억이 되어 여정을 풍성하게 하니 더 그렇다. 오늘 산에서 만난 사람들이 우리에게 요정이 되어 주었듯 우리도 중학생 가족에게 요정이 되었길 바라본다. 서로의 길에서 만난 인연으로 에너지를 주고받았으니 오늘도 각자의 길을 계속 걸어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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