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없이 삶은 달걀을 꾸역꾸역 삼키듯 인내를 삼켰던 이들도 목에 걸린 인내심을 뱉어내며 하나둘 언성을 높이기시작했다. 전유럽노선 승객들이 일제히 각 항공사 창구에서 발권을 다시 해야 하는 상황이니 직원들도 난감하긴 마찬가지였다. 밤 10시가 넘은 시각 끝이 보이지 않는 줄을 선 사람들의 지친 감정과 감정의 터진 봇물을 막을 도리는 없어 보였다.
다행히 직원 창구가 이용가능한 우리 가족은 이틀 뒤 금요일 티켓을 바로 받고 집으로 돌아갔다.
결항 다음 날
다음날에도 눈은 그치지 않았고 결항 릴레이가 이어졌다. 인천공항이 이렇게 눈에 취약한 곳이었던가. 겨울이면 늘 눈이 많이 오는 나라에 살고 있지만 11월 어느 날 갑작스럽게 내린 눈에 공항 측도 어쩔 도리가 없었나 보다라며 너른 마음으로 이해해 본다.
딸아이는 이미 체험학습을, 남편은 휴가를 냈으니 날씨나 장소와 관계없이 우리 가족의 여행은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마음은 이미 포르투갈 리스본으로 보낸우리는 호수공원을 리스본 수정궁 정원인양 어슬렁거리며 산책했다. 그러다 근처 고깃집에 들어가 평생 잊지 못할 결항사태를 추억 속 희극으로 만들며 안주거리 삼았다.
비상하다. 비행기.
안색이 안 좋던 하늘이 파랗고 말간 얼굴을 되찾았다. 하늘의 푸른 혈색이 얼마나 그리웠던지.
파란 하늘 아래 눈이 쌓이지 않은 말끔한 비행기가 서있는 걸 보니 목욕을 끝낸 아기의 동글동글한 몸을 보듯 예쁘고 반갑다.
수요일보다 시간이 약간 빠른 오후 12시 20분 비행기에 탑승했다. 이런저런 혜택을 받아 감사하게도비즈니스 좌석을 이용하게 되었다. 결항이 아니었으면 딸아이도 함께 탔을 텐데 혼자 편안한 자리를 차지한다는 미안함은 15시간의 비행시간 동안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비행기가 일정 궤도에 오르고 좌석 벨트 등이 꺼지자마자 기내식 메뉴판을 보고 식사를 주문하라는 승무원의 안내에 엔도르핀이 솟았기 때문이다.
첫 번째 기내식은 애피타이저 두 번 메인 요리 한 번 디저트 두 번으로 메인 요리는 미리 주문을 받았다. 첫 번째 기내식으로 소고기 스테이크를, 두 번째로는 대구구이를 골랐다.
포르투갈행 비행기 기내식. 두번째 기내식은 잠에 취해 사진 찍는 걸 깜빡했다.
같은 비즈니스 기내식이라도 포르투갈행 비행기의기내식이 나의 미각을 훨씬 더 자극했다. 소고기 스테이크는 부드러웠고 대구구이는 담백했다. 무엇보다 식탁보를 깔아주고 음식이 접시에 담겨서 나오니 레스토랑에 온 기분이었다. 승무원은 자주 와인을 권했지만 술을 좋아하지 않는 나는 사양했다. 술을 좋아하는 남편이 얼마나 신이 나서 마시고 있을지 말리는 사람도 곁에 없으니 마음껏 즐기고 있을 게 분명했다.
한국행 비행기 기내식
영화 두 편과 '작별하지 않는다' 책의 반 정도, 몇 시간의 잠 뒤에 비행기는 어느새 리스본 공항에 우리를 데려다 놓았다.
리스본 항공뷰
볼트의 나라
포르투갈은 일반 택시 보다 볼트라는 앱을 이용해 택시를 타는 게 훨씬 편리하고 저렴하다. 가족끼리 움직이면 지하철을 타는 것보다 볼트를 타는 게 더 싸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우리가 흔히 쓰는 우버와 볼트가 경쟁하고 있어 시간이 되면 두 개의 가격을 비교해서 이용하면 더 저렴하다. 입국한 사람들이 많아 15분을 기다려 만난 포르투갈 기사님은 20분 만에 정확히 숙소 앞에 내려주었다.
아파트먼트 숙소
해외에 나가면 그 나라 마트에서 장을 봐서 요리하는 걸 좋아하는 남편을 위해 숙소는 아파트먼트로 예약했다. 적당한 뷰가 있고 리스본 구시가지 중심에 있으며 취사시설이 있고 침대가 두 개인 숙소로.
Carmo 43 apartment
가족들은 숙소에 대만족 했지만 밤새 창밖의 소음에 시달린 나는 수능 전날 밤처럼 "잠이 안 와"를 연발하며 인고의 시간을 보냈다. 사실 바깥의 소음보다 남편의 코 고는 소리가 더 컸지만 내 귀에는 바깥의 소음만 스피커에서 나오는 음향처럼 귓전에 울렸다. 익숙하지 않은 소음으로 잠 못 드는 긴 밤에시계의 짧은 분침이 부지런히 돌아가길 바라며 눈을 감았다.
"여행을 떠나고 나서야 나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도 시작된다."는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명대사를 기억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