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로 떠나는 날내리는 눈이라 반갑진 않았지만 하루 만에 하얀 겨울나무가 된 단풍나무의 변신에 감탄하며 인천공항을향해 내달렸다.
10:00
탑승 시간까지 남은 3시간 동안 공항을 공원 삼아 산책하며 시간을 허공에 날리고 있었다. 국적도 성별도 나이도 제각각인 사람들은 각자의 사연에 설렘을 담아 공항 내부를성실히 누비고 다녔다. 공항 밖에선 시간을 쪼개 쓰던 이들도 공항안에서보내는 시간은아까워하지 않는다. 여행 전의 관용과 설렘은 시간에게도 예외 없이 적용된다.
12:30
출국 전 통과의식인 컵라면 한 사발까지야무지게해치웠을때 한국을 떠날 만반의 준비를 끝냈다고 생각했다. 당당한걸음으로 탑승구에 도착하니 폭설로 인해 비행기는 기약 없이 지연되고 있었다.눈발은 더 굵어져 농밀한 밀도로 허공을 가득 채우며 흩날리고있었다.창 밖에 서 있는 비행기 몸체에는 화이트 아이싱을 뿌린것처럼 하얀 눈이 쌓여 있었다.폭설이 내린 어느 날, 빗자루를 가져와 자동차의 눈을 쓸어 냈던 것처럼 비행기에 쌓인 눈을 쓱쓱 털어내면 좋으련만 실상은 트럭이 와서 디아이싱용액을 뿌려서 녹여야 했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 저녁 5시 30분.원래 출발시간보다 4시간 반이 늦어졌다고 혼자 중얼거렸을 때 옆에 앉아있던 승객의 얘기 소리가 들렸다.
리스본행 비행기 취소될 거래
바로 옆 탑승구에서 상하이행 비행기가 결항된다는 방송이 들릴 때만 해도 강 건너 불구경하는 마음이었다. 우리 비행기는 뜨겠지막연한 현실 회피용 긍정회로를 돌리고 있었다.
승객 여러분께 알려드리겠습니다
당일 리스본행 비행기는 기상악화로 결항되었습니다
탑승구 앞에 선 직원들은 몰려든승객을 응대하느라 진땀을 빼고 있었다. 면세점에서 물건을 구입한 사람들이 물건을 환불하고 오면 일괄적으로내보내준다고 했다.출국장 안에 들어오면 나가는 것도 허락을 받아야 가능하다. 이 안에선 주어진 명령에만 복종해야 하는 군인과 다를 바 없었다.
18:00
옆에 서있던 외국인이 말을 걸어왔다.
난 살다가 이런 적이 처음이야 어떻게 된 건지 알아?
눈이 많이 와서 그렇대.
근데 지금 눈이 그쳤잖아.
비행기 디아이싱 작업이 늦어져서 그렇대.그래도 넌 LA로 가니 결항은 아니겠다.
리스본행은 결항이고 LA행 비행기는 지연이었다.
살면서 항공기 지연이 이렇게 부러운 건 처음이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날 유럽 전 노선은 취소되었고 결항된 비행기만 79개였다.
18:30
출구로 나가기 위해 다시 줄을 섰는데 앞에 있는키 큰 외국인 청년이 말을 걸어왔다. 발리에서 한국을 경유해서 캐나다로 가는 길이라고 했다.
넌 오늘 어떻게 할 거야?
나도 몰라.
숙소는 예약했어?
내가 숙소를 예약해야 하는 거야?
환승하는 외국인들은 더 날벼락을 맞은 기분이겠다.25년 전 유럽배낭여행에서 돌아올 때 비행 편에 문제가 생겨 7시간 동안 말레이시아 공항에서 시간을 보냈던 적이 있었다. 늦은 밤이라 아예 바닥에 누워서 잠을 잤는데 그때는 항공기 결함으로 인한 지연이라 비즈니스 좌석으로 업그레이드되어 7시간의 바닥잠이 눈 녹듯 보상받았다. 오늘 저 캐나다 청년은 그 시절 나처럼 공항 바닥에서 잠을 잘지도 모르겠다.
직원은 내일 대체편도 없을 거라고 했다.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천재지변으로 인한 결항은 항공사가보상을 할 책임이 없다고한다. 리스본행 다음 비행기는 이틀 뒤였다. 그 비행 편마저도 좌석이 있는지 불확실했다.
19:00
드디어 짐 찾는 곳으로 내려왔다. 온 사방에 트렁크가 세워져 있고 짐을 찾으려는 사람들로 북새통이었다. 수많은 트렁크만 눈보라 속 엄마 잃은 펭귄처럼 가만히 서서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곳에서도 세 시간을 기다려도 리스본행 짐은 나오지 않았다. 시스템 고장으로 짐이못 나오고 있다고 했다.
21:30
의자를 못 찾은 사람들은 바닥에 삼삼오오 앉아 있었다. 카트는 트렁크 대신 기다리는 사람들을 위한 의자가되었다. 저녁도 먹지 못하고 서 있으니 피곤과 두통이 한꺼번에 몸을 짓눌렀다. 짐을 찾은 사람들이 어느 정도 빠져나가고 그날 쿠알라룸푸르 공항에서처럼 의자에 몸을 눕혔다.
22:00
짐 찾았어.
남편의 목소리가 들렸다. 옆에 있던 승객들도 짐을 찾았다며 좋아했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 반갑네요.
다들 화가 날 만도 한데 고함을 지르거나 화내는 사람 없이 차분히 짐을 기다렸고 심지어 짐을 찾았을땐 환하게 웃었다.
사람들의 차분한 태도에 전염되어 나도 별생각 없이 기다릴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공항에 온 지 12시간 만에 집으로 갈 수 있게 되었다.
그저 집에 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뻤다. 지쳐 쓰러진 건 나 혼자일 뿐 남편과 딸은 집에 가서 치킨과 하이볼을 먹자며 모의를 하고 있었다.
딸이 받아온 치킨 상자 사이로 고기 냄새가 차 안의 공기 사이로 스몄다. 오늘 하루의 피곤을 보상해 주는 치킨으로 위로받으며우리 가족은 늦은 만찬을즐겼다.
계획한 당일에 비행기를 타고 떠나는 게 얼마나 감사한지
몇 시간 지연되더라도 출발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평범한 날씨가 얼마나 감사한지
나의 계획대로 일이 진행되고 특별한 일이 없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 지 느끼게 해 준 12시간의 소동이었다.
신은 우리에게 선물을 줄 때 고난과 문제라는 포장지에 싸서 준다고 한다. 문제를 잘 풀고 포장지를 벗기면 가치 있는 선물이 기다리고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