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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눈에서 얻은 삶의 성장

작별하지 않는다.

by 리인

얼굴에 쌓이는 눈. 그러나 녹지 않는 눈.

인선이 축대에서 미끄러져 다쳤던 날,

인선의 어머니는 어린 인선의 뺨에 내려앉은 눈이 녹지 않는 꿈을 꿨다.


온기를 잃고 얼어버린 사람의 얼굴 위에서 녹지 않는 눈.

인선의 사고를 예측했던 엄마의 꿈속 눈은 인선 엄마의 열세 살 기억 속 눈과 닮아있었다.


군경에게 죽음을 당한 아빠, 엄마, 오빠, 동생의 시신을 찾기 위해

수많은 시체의 얼굴에 쌓인 살얼음이 된 눈을 걷어낼 때,

숨결이 사라진 얼굴 위에서 더 이상 녹이지 못하던 눈은

피어린 얼음이 된다는 걸 인선의 엄마는 알게 되었다.


눈은 억울한 주검이 된 얼굴을 덮어 잊히게 만든다는 걸.

그녀는 두려움에 잠식당하지 않고 눈을 치워 혈육을 찾아냈다.

피얼음 아래의 혈육을.


포식자들에게 표적이 되지 않으려고 본능적으로 고통을 참으며

횟대에 앉아있는 인선의 앵무새처럼

미약한 시민들은 각자의 둥지에서 견디고 또 견뎠다.

눈보라 속에 잠들고 싶은 마음을 누르며 새처럼 앉아 있었다.

주인공 경하는 인선의 부탁으로 제주 인선의 집으로 가다

인간을 무기력하게 묶어버리는 눈보라를 만난다.

그곳 제주에 사는 인선에게는 익숙한 형태의 눈보라였다.


인선과 인선의 엄마, 가족들이 겪었을 침묵의 고통을 덮어 버리려던 눈이었다.

그런 눈에 맞서며 경하는 끝까지 인선의 집으로 나아간다.

태풍의 눈 속으로 들어간다.


모든 진실의 얼굴을 구분할 수 있는 판단의 지혜를 가리려는 눈을 파헤쳐

응당 알아야 할, 알려야 할 사실을 직시한다.

희망을 향해 한 발짝 씩 내딛으려면

눈보라가 휘몰아쳐도 성실한 한 걸음을 포기해선 안된다.


경하는 하얀 눈이 쌓여 없어진 길을 기꺼이 만든다.

그것이 경하가 인선의 희망을 다시 만들어 가는 과정이다.


경하가 눈보라 속 버스정류장에서 만난 할머니는

오랜 고통에 단련된 침통한 침착함을 가지고 있다.

그녀는 폭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버스가 오기를 기다린다.

따뜻하고 아늑한 장소를 데려다줄 버스를

감정과 신체의 동요 없이 무심하게.



삶이란


세찬 눈이 시선을 막고 소리를 삼키고 움직임을 막아버린

삶의 역설 가운데서도 의연하게 다가올 버스를 기다리는 것.


그 버스를 타고 각자의 목적과 희망이 있는 삶의 장소로 다가가는 것.


진실을 가리기 위해,

사실을 왜곡하기 위해,

희망의 이동을 막기 위해

내리는 눈을 쓸어내고

뚫고 들어가

새로운 길을 찾아내는 것.


- 성근 눈이 내리고 있었다.

고된 여정의 시작을 알리는 책의 첫 문장이었다.


물과 바람과 해류가 순환하듯 눈송이도 순환한다.

삶도 순환한다.


눈발 속에서도 몸속의 온기는 서서히 퍼진다.

살아만 있다면,

깨어만 있다면.



재미로 소설을 읽던 내게 한강 작가의 소설 3종은 읽어내는 것 자체가 일이었습니다.

책을 다 읽었을 때 힘겨운 노동을 끝낸 것처럼 묵혀둔 한숨이 터져 나오며 마음이 요동쳤습니다.


소설을 통해 사람의 인생을 알고, 인생을 살고, 그들의 회환에 같이 발을 담글 수 있었습니다.

4.3 사건이라는 고통의 진실을, 잊힌 아픔을 기억에 담습니다.


똑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고 하지요.


7년 전 채식주의자를 읽었을 때와 얼마 전 다시 읽었을 때의 느낌은 너무도 달랐습니다.

7년 동안 나이테가 쌓이고 수많은 꽃과 잎을 떨어뜨리고 열매를 맺는 과정이 있었기 때문이겠지요.


삶의 나이테는 책과 사유와 함께 더 농밀하게 둘러질 분명합니다.


그 여정에서 길을 멈추고 나를 반추하게 만드는 소설은

나를 비춰볼 수 있는 샘물과 같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나와 나의 생각을 들여다볼 수 있는

깨끗한 샘물이요.


7년 뒤 다시'작별하지 않는다'를 읽었을 때 얼마나 성장해 있을지 생각하며 삶의 성장에 게으르지 않으려고 합니다.


한 줄 요약 : 삶의 성장과 그 성장을 확인하는 일에 게으르지 않으려 책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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