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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돌보는 글쓰기를 한다면

by 리인

----내 안의 울림 찾기


나를 돌보는 글쓰기를 한다는 건 내 안의 울림을 찾아내는 일이다. 책을 읽으면 울림을 주는 문장이 내게로 다가오듯 나를 돌보는 글을 쓰면 내 마음속 울림이 나에게 소리를 낸다. 울림의 소리를 알아채고 들여다보면 어느새 나를 깊이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내 과거의 서사와 잊힌 기억, 잊고 싶은 기억, 사진처럼 선명한 기억의 혼재 속에서 그것을 나의 언어로 옷을 입혀 세상에 꺼내 놓는다.

나의 언어로 옷을 입은 과거의 기억을 써 내려가다 보면 내 안에 지니고 있던 울림이 내게로 다가오는 걸 느낀다.


울림을 찾지 못하고 글을 세상에 내놓아도 괜찮다. 다른 사람이 내 글을 읽고 내게 말하는 이야기를 들으며 울림을 찾기도 한다. 그리고 깨닫는다. 나도 인식하지 못하는 새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는 걸.

요즘 〈나는 나를 치유한다〉라는 제목으로 나를 돌보는 글쓰기를 하고 있다.

처음 의도는 남을 위한다는 거였다. 나처럼 어릴 적 상처받은 영혼을 가진 이들에게 내가 치유한 이야기를 들려주며 도움을 주고 싶었다. 그런데 치유받은 현재의 내가 어릴 적 상처받은 나를 바라보며 글을 쓰는 과정에서 또다시 내가 치유를 받는 일이 일어났다.


글을 쓰며 어릴 적 나를 대견하게 측은하게 미소 지으며 대하다 보니 현재의 내가 과거의 나를 치유해 주는 것만 같았다. 울림의 지점을 발견하면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할 기회가 다시 생겼다.


아버지같이 불면증을 겪고 있는 독자분들이 마음을 열고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을 때 울림은 두 배가 되었다. 어릴 적 내가 아버지를 바라보던 시선에서, 현재의 내가 어릴 적 내가 되어 아버지를 바라보는 시선으로 바뀌면서 글을 쓰기 전보다 아버지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되는 선순환이 일어난 것이다. 이미 모든 걸 이해한다고 생각했는데 나도 예상하지 못한 더 깊은 이해가 일어났다.

글을 쓰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울림이, 글을 공개하지 않았다면 생기지 않았을 치유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내게로 다가왔다.



---- 나에게 건네는 말투 발견하기

나를 글로 쓴다는 건 내가 나에게 이야기를 건네는 말투를 발견하는 일이다. 우리는 여러 사건을 겪으며 사건의 중심에 있는 나에게 끊임없이 말을 건다. 의식한 채로 또는 의식하지 못한 채로.

때론 비난의 말투로, 때론 책망의 말투로,

때론 조롱의 말투로, 때론 폄하의 말투로,

때론 위로의 말투로, 때론 격려의 말투로,

때론 포옹의 말투로, 때론 허용의 말투로,

때론 수긍의 말투로, 때론 수용의 말투로,

때론 긍정의 말투로, 때론 인정의 말투로.

나에게 건네는 말투에 따라 똑같은 기억도 아픔에서 이해로 변신하고 고통에서 성장으로 변환된다. “잘했다”라는 한 마디가 격려일 수도 칭찬일 수도 비난일 수도 조롱일 수도 있는 것처럼 말이다.

나를 표현할 때 내가 나에게 건네는 말투에 따라 울림의 발견도 달라진다.

나를 향한 다정한 말투는 과거의 나에게 위로가 되는 울림의 발견이 일어나게 한다.


과거를 표현하는 나의 언어와 나에게 건네는 말투가 과거의 나를 변화시키고, 변화된 과거의 내가 또다시 현재의 나를 변화시키는 기적. 나를 돌보는 글쓰기를 할 때 일어나는 기적이다.



---- 서사적 감수성과 서사적 치유


나를 돌보는 글쓰기를 통해 “서사적 감수성”이 발전하게 된다. 자신의 감정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을 이해하고 말로 표현하여 답답하고 꽉 막힌 감정을 풀어 주는 것. 그래서 내가 과거에 왜 그런 감정을 느꼈는지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알아내는 것. 그것을 치유의 말로 표현하는 것, 그것이 바로 “서사적 감수성”이자 “서사적 치유”이다.


나를 돌보는 글을 쓰며 울림을 발견하고 나에게 다정한 말투로 이야기를 건네 서사적 치유를 얻는 것.


이 과정을 통해 나를 알게 되고 나 자신과 친하게 된다.

삶을 살아가면서 가장 가까이 있는 나와 친하게 된다면 어떻게 성장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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