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교시 영어시간, 생기의 눈에 졸음이 덮이기 시작했다. 생기의 고개가 리듬을 타듯 아래위로 까딱거렸다. 생기는 고개를 크게 한 번 꾸벅하더니 짙은 졸음을 걷어내고 수업 속으로 들어왔다.
'가끔'을 제외하고, 생기는 모든 활동을 뚝딱 해치웠고 자신의 생각도 명확하게 글로 표현했다.
생기가 정면을 응시할 때면 앞 가르마를 타고 내려온 긴 머리에 반쯤 가려진 금속 안경 너머로 길고 얇은 눈이 반짝였다.
서로가 새롭고 서먹한 봄이 지나고 친근감이 땀처럼 베이는 여름이 시작되면, 아이들은 본연의 모습을 드러내며 일상을 함께 할 벗을 찾아낸다. 생기 주변만 아직도 서먹한 봄의 기운이 돌았다.
쉬는 시간이 되면 서로의 단짝과 만나는 아이들 틈에 생기는 움직임 없이 앉아 있었다. 그림을 그리고 있는 생기의 뒷모습은 긴 머리 탓에 나무처럼 보였다. 생기는 그 자리에 나무처럼 앉아서 애니매이션 그림을 그렸다. 교실 속 자유로운 새들은 이리저리 날아다니느라 바빴고 생기에게 들르는 새는 아무도 없었다.
푸석푸석한 긴 머리의 생기가 노트에 그리는 캐릭터는 찰랑거리는 금발에 SF영화에 나올 법한 세련된 전투복을 입고 있었다.
"와~ 캐릭터가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아. 진짜 정교하게 잘 그리는구나."
내 말에 수줍은 미소와 함께 "감사합니다."라고 작게 속삭이고는 벨트를 색칠하던 주황색 색 펜을 다시 움직였다.
생기는 쉬는 시간마다 자신의 세계에서 만든 캐릭터를 조금씩 완성해 갔다. 어떤 날은 소우주처럼 당당해 보이기도 했고 어떤 날은 외딴섬처럼 외로워 보이기도 했다.
경중을 따지자면 외로움보단 단단함, 희미한 빛 보단 아우라였다. 생기에 대해 조금 더 알고 싶어졌다. 여전히 혼자 그림을 그리고 있는 생기에게 말을 건넸다.
"생기야, 학교 끝나고 선생님이랑 잠깐 이야기할 수 있어?"
생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생기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흔들림 없는 큰 나무였다.
열두 살에게 맞게 설계된 교실은 생기의 나뭇가지를 감당하기에는 작은 곳이었다.
다른 아이들도 생기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되면
생기의 나뭇가지에 놀러올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면 이해하게 되고 이해하면 사랑하게 된다는 법칙이
아이들에게도 통할거라고 믿었다.
영어로 수업을 하는 영어 시간과는 달리 도덕 시간에는 여러 가지 가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이 많았다. 그날은 '배려'에 대해 배우는 시간이었다.
작은 배려가 사람에게 얼마나 큰 힘을 줄 수 있는지 개그맨 유재석 씨의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들려줬다.
"선생님이 어느 군인 아저씨의 이야기를 들려 줄게요."
내가 이병으로 근무할 시절, 마음을 터놓을 친구도 없고 군생활에 적응도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집안 사정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 입대를 결심했는데 더 심각한 상황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생을 끝내겠다는 못난 마음을 품었다.
다음 날 새벽 SBS 방송국 앞 시내로 작업을 나갔고, 잔디밭 놀이터에서 지뢰탐지기를 들고 군통신 맨홀을 찾고 있었다. 같이 나갔던 간부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콜라가 먹고 싶어 주머니를 뒤졌더니 50원 밖에 없었다.
콜라도 못 먹고 죽는구나 하는 마음에 헛웃음을 치고 있는데 인기척이 나서 뒤돌아 보니 유재석 씨가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엉겁결에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놀이터에서 지뢰탐지기? 그거 지뢰탐지기 맞죠? 그걸로 뭐 찾는 거예요?
유재석 씨가 물었고, 군사기밀이라고 하니 "죄송합니다"하고는 매니저 분이랑 가던 길을 갔다.
몇 분 후, 누가 등을 쳐서 뒤돌아 보니 유재석 씨가 음료 2개와 아이스크림을 건넸다.
"더운데 이거 드시면서 하세요. 충성, 수고하세요." 하고는 방송국 쪽으로 사라졌다.
앉아서 음료수를 마시는데 눈물이 계속 났다.
울면서 음료수와 수박바를 다 먹었고 또 한참을 앉아서 엉엉 울었다.
그날 근무를 끝내고 이상하리만치 단잠을 잤다. 그날 이후로 내 생활은 놀랄 만큼 바뀌었고 군대 생활도 잘 해냈다. 더운 날 유재석 씨에게 받은 배려와 음료 그리고 수박바는 나의 인생을 바꾼 터닝 포인트가 됐다.
이야기를 읽어주고 나서 군인 아저씨의 마음을 변하게 한 것이 무엇이었을까에 대해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유재석씨의 작은 배려, 캔 음료와 수박 바 한 개의 친절이 글을 쓴 군인에게 버텨내고 살아낼 힘이 되었다는 사실을 아이들도 마음으로 느끼고 있었다.
때로는 단 한 번의 친절이나 배려를 통해 한 사람의 인생이 바뀌기도 한다. - 재키 찬-
"선생님은 여러분이 이 작은 교실에서부터 작은 배려를 시작했으면 좋겠어요."
여자 아이들 중 몇 명이 고개를 숙였다. 뭔가 미안하고 난감한 표정이 숙인 얼굴에서 스쳐갔다.
생기의 긴머리 2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