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생기의 긴 머리 1

by 리인

5교시 영어시간, 생기의 눈에 졸음이 덮이기 시작했다. 생기의 고개가 리듬을 타듯 아래위로 까딱거렸다. 생기는 고개를 크게 한 번 꾸벅하더니 짙은 졸음을 걷어내고 수업 속으로 들어왔다.


'가끔'을 제외하고, 생기는 모든 활동을 뚝딱 해치웠고 자신의 생각도 명확하게 글로 표현했다.

생기가 정면을 응시할 때면 앞 가르마를 타고 내려온 긴 머리에 반쯤 가려진 금속 안경 너머로 길고 얇은 눈이 반짝였다.


서로가 새롭고 서먹한 봄이 지나고 친근감이 땀처럼 베이는 여름이 시작되면, 아이들은 본연의 모습을 드러내며 일상을 함께 할 벗을 찾아낸다. 생기 주변만 아직도 서먹한 봄의 기운이 돌았다.


쉬는 시간이 되면 서로의 단짝과 만나는 아이들 틈에 생기는 움직임 없이 앉아 있었다. 그림을 그리고 있는 생기의 뒷모습은 긴 머리 탓에 나무처럼 보였다. 생기는 그 자리에 나무처럼 앉아서 애니매이션 그림을 그렸다. 교실 속 자유로운 새들은 이리저리 날아다니느라 바빴고 생기에게 들르는 새는 아무도 없었다.


푸석푸석한 긴 머리의 생기가 노트에 그리는 캐릭터는 찰랑거리는 금발에 SF영화에 나올 법한 세련된 전투복을 입고 있었다.

"와~ 캐릭터가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아. 진짜 정교하게 그리는구나."

내 말에 수줍은 미소와 함께 "감사합니다."라고 작게 속삭이고는 벨트를 색칠하던 주황색 색 펜을 다시 움직였다.


생기는 쉬는 시간마다 자신의 세계에서 만든 캐릭터를 조금씩 완성해 갔다. 어떤 날은 소우주처럼 당당해 보이기도 했고 어떤 날은 외딴섬처럼 외로워 보이기도 했다.


경중을 따지자면 외로움보단 단단함, 희미한 빛 보단 아우라였다. 생기에 대해 조금 더 알고 싶어졌다. 여전히 혼자 그림을 그리고 있는 생기에게 말을 건넸다.

"생기야, 학교 끝나고 선생님이랑 잠깐 이야기할 수 있어?"

생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생기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흔들림 없는 큰 나무였다.

열두 살에게 맞게 설계된 교실은 생기의 나뭇가지를 감당하기에는 작은 곳이었다.


다른 아이들도 생기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되면

생기의 나뭇가지에 놀러올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면 이해하게 되고 이해하면 사랑하게 된다는 법칙이

아이들에게도 통할거라고 믿었다.


영어로 수업을 하는 영어 시간과는 달리 도덕 시간에는 여러 가지 가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이 많았다. 그날은 '배려'에 대해 배우는 시간이었다.

작은 배려가 사람에게 얼마나 큰 힘을 줄 수 있는지 개그맨 유재석 씨의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들려줬다.


사진 출처 : https://theqoo.net/square/1282795111

"선생님이 어느 군인 아저씨의 이야기를 들려 줄게요."


내가 이병으로 근무할 시절, 마음을 터놓을 친구도 없고 군생활에 적응도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집안 사정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 입대를 결심했는데 더 심각한 상황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생을 끝내겠다는 못난 마음을 품었다.


다음 날 새벽 SBS 방송국 앞 시내로 작업을 나갔고, 잔디밭 놀이터에서 지뢰탐지기를 들고 군통신 맨홀을 찾고 있었다. 같이 나갔던 간부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콜라가 먹고 싶어 주머니를 뒤졌더니 50원 밖에 없었다.


콜라도 못 먹고 죽는구나 하는 마음에 헛웃음을 치고 있는데 인기척이 나서 뒤돌아 보니 유재석 씨가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엉겁결에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놀이터에서 지뢰탐지기? 그거 지뢰탐지기 맞죠? 그걸로 뭐 찾는 거예요?

유재석 씨가 물었고, 군사기밀이라고 하니 "죄송합니다"하고는 매니저 분이랑 가던 길을 갔다.


몇 분 후, 누가 등을 쳐서 뒤돌아 보니 유재석 씨가 음료 2개와 아이스크림을 건넸다.

"더운데 이거 드시면서 하세요. 충성, 수고하세요." 하고는 방송국 쪽으로 사라졌다.


앉아서 음료수를 마시는데 눈물이 계속 났다.

울면서 음료수와 수박바를 다 먹었고 또 한참을 앉아서 엉엉 울었다.


그날 근무를 끝내고 이상하리만치 단잠을 잤다. 그날 이후로 내 생활은 놀랄 만큼 바뀌었고 군대 생활도 잘 해냈다. 더운 날 유재석 씨에게 받은 배려와 음료 그리고 수박바는 나의 인생을 바꾼 터닝 포인트가 됐다.


이야기를 읽어주고 나서 군인 아저씨의 마음을 변하게 한 것이 무엇이었을까에 대해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유재석씨의 작은 배려, 캔 음료와 수박 바 한 개의 친절이 글을 쓴 군인에게 버텨내고 살아낼 힘이 되었다는 사실을 아이들도 마음으로 느끼고 있었다.


때로는 단 한 번의 친절이나 배려를 통해 한 사람의 인생이 바뀌기도 한다. - 재키 찬-


"선생님은 여러분이 이 작은 교실에서부터 작은 배려를 시작했으면 좋겠어요."

여자 아이들 중 몇 명이 고개를 숙였다. 뭔가 미안하고 난감한 표정이 숙인 얼굴에서 스쳐갔다.



생기의 긴머리 2에서 이어집니다.




keyword
이전 03화햇살과 망치가 공존하는 교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