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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기의 긴 머리 2

by 리인

생기의 긴 머리 1에서 이어지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이 생기와 이야기를 잘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어요.

그래서 오늘은 서로 솔직하게 마음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생기야, 너는 어때?"

"좋아요."

생기의 담담한 "좋아요." 끝에 스치는 설렘이 보였다.


한 곳으로 흐르던 마음의 물결은 다른 마음과 닿아 어우러진 순간 더 맑고 푸른빛을 만들어 낸다.

생기는 푸른 물결을 만드는 과정의 두려움을 깨고 설렘과 용기의 조각을 삼켰다.


"방금 유재석 씨가 군인 아저씨에게 주었던 배려,

군인 아저씨가 흘렸던 고마움의 눈물,

그 순간 우리가 느꼈던 감동을 마음에 담고

서로 이야기 나누면 좋겠어요."


잠깐의 침묵이 지나간 후, 지우가 손을 들었다.

"생기한테 궁금했던 거 솔직하게 물어봐도 돼요?"

"그럼요."


"있잖아. 넌 수업시간에 자주 졸던데 그 이유가 궁금했어."


"어... 난 밤늦게까지 애니메이션을 그려. 그림을 그리다 보면 시간이 금방 지나가 버려서 자꾸 새벽에 잠들게 돼."


고개를 끄덕이던 유진이가 이어서 말했다.

"넌 그림을 정말 잘 그려. 근데 그림이 너무 어른 그림 같아 보일 때가 있어."

생기의 그림체는 다소 성숙했고 과장되기도 했다.


"너희들이 그림을 불편해할 거라고는 생각을 못했어. 보는 사람의 느낌도 중요하니까 조절해서 그릴게."


생기는 쨍한 가을 햇살에 밤톨을 조금씩 드러내는 밤송이처럼 자신을 조금씩 열어 보여주고 있었다.


"너 혹시 머리를 길게 기르는 이유가 있어?"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해린이가 물었다.


"난 소아암 어린이들에게 가발을 만드는 곳에 머리카락을 기부하기 위해 머리를 기르고 있어. 가발을 만들려면 염색이나 파마를 하면 안 돼서 좀 지저분해."


순간 아이들의 표정에 놀람과 머쓱함, 경외감이 공존했다. 여자 아이들 중 몇 명의 입에선 숨을 들이는 마시는 소리가 났고, 몇 명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선생님도 여러분처럼 생기에게 처음 이야기를 듣고 많이 놀랐고, 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친구들도 생기에게 궁금한 점을 어느 정도 물어본 것 같으니까 생기도 친구들에게 하고 싶은 말 해봐요."

생기가 친구들에게 어떤 말을 하고 싶을지 궁금했다.


"나도 학교에서 너무 많이 조는 것 같아 요즘 일찍 자려고 노력하고 있어. "


아이들과 생기의 표정에 긴장감과 경계가 걷히고 편안함과 유대감이 스며들었다.

하얀 호기심의 백사장에 아이들이 먼저 낸 발자국에 생기의 발자국이 한 걸음씩 포개졌고, 발걸음의 속도는 어느새 맞춰지고 있었다.

아이들을 보며 말했다.


"이제 생기의 마음을 조금은 알게 된 것 같은데 생기에게 더 할 말 없나요?"


그때 늘 말없이 자신의 일을 하는 정연이가 일어나 말했다.

"너한테 말 걸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어. 미안해. 그리고 우리 사이좋게 지내자."

"고마워."

생기가 대답했다. 그렇게 생기의 세계에 조심스럽게 정연이가 들어왔다.


그 순간 해린이도 "나도 미안했어."하고 말했다.

정연이가 시작한 "미안해"는 바닷가 첫새벽 갈매기 울음의 연결처럼 해린이에게로 이어졌다.


생기는 또래보다 깊은 생각과 앞서가는 행동으로 받는 오해와 냉대에도 자신의 본성을 버리지 않았고, 자신의 바다 안에서 자신이 내어줄 수 있는 소중한 마음을 키우고 있었다.


그 물결에 아이들이 조금씩 흘러가 닿기 시작했다.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흐르지 못했던 마음의 물결은 이해의 바람을 만나 어우러졌다.


나는 내가 반드시 해야 하는 일들만 생각할 뿐,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신경 쓰지 않는다. 이러한 규칙은 실생활과 지적인 삶에서 똑같이 어려운 일이지만, 위대함과 평범함을 나누는 잣대가 된다.


위대한 사람은 군중 속에서도 완벽한 따사로움을 유지하며 고독하게 홀로 서는 사람이 아니겠는가! *


생기는 교실 속에서 혼자였지만 소아암을 가진 아이들과 교감하며 완벽한 따사로움을 유지했다.

그저 비슷비슷한 군중 속 하나의 점으로 흐려지지 않은 것,

소외되는 느낌을 두려워하지 않은 것이야 말로

생기를 생기답게 만들었다.


두 갈래 길에서 사람이 적은 길을 선택하는 용기는

나에 대한 신뢰와 선의에 대한 확신이 있을 때 가능하다.


생기는 아이들 틈에서 말없이 그림을 그리며 선의를 담은 행위로 자신의 원칙을 지켰고,

그것이야말로 푸른 용기이자 배려였다.


그날 이후로 생기와 정연이가 같이 다니는 모습이 교실과 복도에서 종종 눈에 띄었다.

그렇게 생기는 6학년이 되었고 나는 다시 5학년 영어 교사로 남았다.


6학년 졸업식날 행사가 끝나고 아이들이 가족들과 사진을 찍느라 시끌벅적하던 틈에 누군가 나를 불렀다.

"선생님!"

뒤를 돌아보니 생기가 서 있었다.

"어머 생기야, 잘 지냈어?"

"네... 선생님. 그때 저 도와주셔서 감사했어요."

생기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나는 두 팔을 벌려 생기를 안아주었고 그렇게 한동안 같이 눈물을 흘렸다.

생기의 머리카락은 소아암 친구들을 위해 생기가 불어넣은 활력의 숨만큼 짧아져 있었다.





* 자기 신뢰 철학, 랄프 왈도 에머슨

사진 출처 : 핀터레스트, 챗 g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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