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그리는 빨간 연필

by 리인

수업 첫날, 우민이는 걱정이 많은 사람처럼 어깨가 축 처진채 앉아 있었다. 표정은 없지만 어둠이 느껴졌다.

적응 기간이 지나고 본격적으로 수업이 시작됐을 때, 우민이는 짝과 대화를 나누고, 모둠 활동에 참여하며 조금씩 깨어났다. 그러다 어떤 날은 다시 표정 없는 얼굴로 앉아 있곤 했다.

마음의 추위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입은 외투가 너무 무거워 마음이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것만 같았다.


우민이는 쓰는 걸 힘들어했다. 쓰는 데 성공하더라도 손에는 연필 대신 네임펜을 쥐고 있었다. 펜으로 쓴 단어는 군데군데 뭉개져 알아보기 힘들었다. 어쩌면 감추고 싶은 마음을 숨기기 위한 가장 적합한 필기도구를 선택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민아, 이제 네임펜 말고 연필로 써보자."

우민이는 다른 필기도구를 찾는 듯하더니 이내 네임펜을 잡았다.

"왜 연필 말고 네임펜으로 쓰고 싶어?"

"... 연필심이 뾰족해서 나를 찌를 것 같아요. 그래서 못 쓰겠어요."

우민이가 용기 내어 꺼내놓은 마음을 잘 받아주고 싶었다.

퇴근하고, 책상 서랍에서 빨간 줄무늬 연필을 꺼냈다.

어릴 적 처음 학교에 입학하던 날, 엄마는 새 연필 세 자루를 정성스럽게 깎아주었다.

칼끝을 따라 동그랗게 말리며 벗겨지는 나무 조각 아래로, 연필 끝이 점점 다듬어졌다.

엄마의 손놀림이 점점 빨라지고, 까만 연필심이 살며시 모습을 드러내면 설렘에 꼴깍 침을 삼켰다.

엄마는 연필심을 칼로 쓱쓱 긁어, 뭉툭한 연필심에 쓰기 좋을 만큼의 날카로움을 입혔다. 맨들하게 깎은 연필을 손에 잡으면 하루 종일 글씨가 쓰고 싶었다.


엄마가 나를 위해 깎아주던 연필, 그 연필로 글씨를 쓰고 싶었던 마음을 떠올리며 사각사각 연필을 깎았다.

우민이를 위해 연필심은 벼리지 않고 납작한 대로 두었다.

시간이 지나면 우민이에 맞게 적당히 둥글어지겠지.


다음 시간에 우민이에게 다가가 연필을 건넸다.

"우민아, 선생님이 연필심 뾰족하지 않게 깎아 왔으니까 영어시간에 이걸로 써. 그리고 다른 친구들한테는 비밀이야."

우민이는 꾸벅 인사를 하며 연필을 받았다.


그 뒤로 우민이의 손에는 빨간 줄무늬 연필이 들려있었고, 쓰기 위한 움직임도 제법 빨라졌다.

깜빡하고 연필을 꺼내지 않은 날도 "우민아"하고 부르면 책상 안, 바구니에서 빨간 줄무늬 연필을 꺼냈다.

연필화를 그리기 위해 샀던 연필이 우민이의 세계를 그리고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우민이의 얼굴에는 어둠과 무거움이 걷히고, 밝음과 안정감이 자리 잡았다.

역할극을 할 때는 역할에 심취해 연기를 하기도 하고, 게임활동을 할 땐 신나서 뛰어다니기도 했다.

다른 친구들에겐 자연스러운 행동이 우민이에겐 특별하고 소중하게 느껴졌다.

하루 종일 같이 보내는 담임 선생님과 친구들의 선한 에너지가 우민이에게 가닿았음을 직감했다.


4학년이 끝나가던 11월, 복도에서 만난 우민이는 숙제를 벌써 다했다고 말했다.

영어수업은 이틀 뒤였지만 오늘 검사를 받고 싶다고 했다.

얼른 가져오라는 말에 교실로 뛰어들어가 공책을 가져오는 얼굴이 해사한 미소로 물들었다.


마지막 받아쓰기 시험이 있던 날,

우민이는 여덟 개의 단어 중 다섯 개를 맞혔다.


어두운 표정으로 앉아있던 우민이에게 일어난 적극적인 변화이자 놀라운 성취였다.

우민이는 겨울을 뚫고 꽃망울을 터뜨린 개나리처럼 단단하게 피어나고 있었다.

"선생님, 저 다섯 개나 맞았어요."

수업이 끝나자마자 우민이가 흥분된 표정으로 시험지를 보여주며 말했다.

"와~~ 마지막 단어는 길고 복잡했는데 그것도 맞았네. 어떻게 이렇게 많이 맞힌 거야?"

"어제 집에서 한 시간 넘게 공부했어요."

"와~ 멋있다. 기분이 어때?"

"너무 뿌듯해요."

우민이의 뿌듯함은 스스로에게 보내는 믿음이었다.


복도에서 마주친 우민이 담임선생님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자 선생님이 웃으며 말했다.

"우민이가 어제 '와~ 내일 영어 들었다' 하면서 엄청 좋아했어요."

우민이는 자신을 가리고 있던 장막을 걷고 환하게 웃으며 햇볕 속으로 성큼 다가섰다.


우민이의 얼굴엔 이제 다양한 표정이 존재한다.

놀람, 웃음, 익살, 장난. 찡긋.

다채로워진 우민이의 표정만큼 우민이의 마음에도 다양한 감정이 생겼기를.


빗장을 닫고 속박했던 마음의 바다는

빛과 바람을 들여

쪽빛 파도처럼 맑게 자유로워졌다.


명령이 아닌 질문으로,

잔소리가 아닌 공감으로,

바람이 아닌 관심으로

스스로 나아가게 하는 것!


시험지를 들고 온 우민이의 손에

빨간 연필이 들려있었다.


자녀에게 대물림되어야 마땅한 정신을 편지로 써 내려갈 부모들을 초대합니다!

엄마의 삶을 통해 '사는 힘'을 건네받고 싶은 모든 MZ자녀들을 초대합니다!

'아이야' 편지극 참석 신청서



여러분에게 찾아오는 삶의 순간을 행복으로 직조하세요!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18437104


keyword
이전 06화사랑하다고 말하는 아이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