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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나들이 Dec 30. 2023

꿈과 열정으로 새로운 나를 만들다.

성취하는 삶

이전에 한 번도 성취한 적이 없는 것을 성취하려면 이전에 한 번도 되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데일 카네기-


초등학교에 영어 과목이 들어오면서 학교에서 2~3명씩 의무적으로 영어연수를 받아야 하는 시절이 있었다. 학창 시절 영어가 최애과목이었던 나는 한 달 과정의 기본 연수를 받고 연이어 심화연수도 받았다. 180시간 동안 영어 회화와 영어교수법배울 수 있다니 나로서는 감사합니다 소리가 절로 나오는 일이었다. 방학 동안 며칠도 쉬지 못해서 체력적으로 힘들긴 했지만 배움의 기쁨이 더 컸다.


 그렇게 년이 지나고 6개월 과정 심화연수가 생겼다. 당시에는 학교마다 원어민 교사가 있던 시절이었다. 장기심화연수를 통해 영어 실력을 갖춘 교사를 양성한 뒤 원어민 교사를 서서히 줄여나가기 위한 정책의 하나였다. 아들이 다섯 살, 딸이 세 살 되던 해였다. 5개월 국내 연수와 1개월 해외 연수. 아이들이 어려서 걱정도 됐지만 해외 연수를 갈 수 있다는 사실에 마음은 벌써 두 방망이질을 해댔다.


 어렸을 때부터 해외 유학을 가는 게 꿈이었다. 하지만 우리 집이 유학 보내줄 형편은 못된다는 걸 직감했고 교대에 진학하면서 유학의 꿈은 접었다. 그런데 한 달간 미국 대학에서 수업을 받을 수 있다니 이건 신이 주신 기회라고 생각했다.


양가 부모님들은 멀리 지방에 셨고 주변에 육아를 도와줄 사람은 없었다. 학교일과 육아, 연수 이 모든 걸 남편과 둘이 해내야 했다. 퇴근시간을 미루며 매일 온라인 수업을 들었다. 주말에 아이들을 돌봐주는 남편 덕분에 오프라인 수업도 수월하게 들으며 해외 연수날만 손꼽아 기다렸다.


 5개월의 국내 연수가 끝나고 해외 연수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 예상치 못한 난관이 닥쳤다. 신종플루가 터진 것이다. 목 빠지게 기다리던 해외 연수가 신종플루로 인해 무기한 연기되었다. 실망감이 컸지만 다시 연수가 시작되기만을 기다렸다.


 8개월쯤 지나고 난 뒤 공문이 내려왔다. 원래는 교육청에서 주관하는 무료 연수였는데 신종플루로 인한 예산 부족으로 인해 비행기 항공료는 지불해야 한다고 했다. 단, 가기 전 시험과 과제 점수를 합산하여 상위 10% 성적을 받은 교사에게는 항공료가 제공된다고 했다. 괜한 승부욕이 발동했다. 밤잠을 줄여가며 시험 준비를 했다. 운 좋게도 좋은 성적을 받게 되었고 항공료까지 지원받아 미국에 갈 수 있었다.


 두 아이들은 해외출장이 잦은 남편 대신 어머니와 동서가 데려가서 봐주었다. 그 당시에 동서는 딸 둘을 키우면서 셋째를 임신 중이었다. 그런데도 나에게 먼저 아이들을 봐줄 테니 집으로 보내라고 말해주었다. 천둥벌거숭이 둘을 한 달간 봐준 동서와 어머니에 대한 고마움은 잊을 수가 없다.  


 테솔 수업이 진행된 곳은 텍사스의 작은 시골마을이었다. 밖에 나가면 사람 구경하기조차 힘들었다. 대학교의 기숙사에서 거주하면서 테솔 수업을 받았다. 귀를 쫑긋 세우고 주변에서 들려오는 영어를 이해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다 보니 10시만 되면 피곤해 곯아떨어지기 일쑤였다. 그렇게 졸음과의 사투를 벌이며 수업을 듣고 과제를 다.


 4주 과정 중 마지막 주에는 인근 초등학교로 참관수업을 나갔다. 텍사스가 멕시코와 접경지역이라 그런지 멕시코 학생이 많았다. 컨테이너로 만든 교실에서 15명 남짓의 아이들이 수업을 들었다. 참관하며 관찰한 것, 알게 된 것들을 노트에 적어 제출하는 것이 과제였다. 현지 학생들이 교사와 함께 하는 활동과 지내는 모습을 자세히 관찰하고 써내려 갔다.


 학교에 쉬는 시간은 따로 없었고 화장실에 다녀오고 싶은 아이만 조용히 다녀왔다. 한국과 가장 큰 차이점이 복도에서 크게 얘기하거나 뛰어다니는 아이가 없다는 것이었다. 다 같이 놀이터에 나가 노는 놀이 시간을 제외하고는 교실에서 조용히 생활했다. 수업시간에도 발표를 하기 위해 '저요. 저요' 하고 말하는 아이 하나 없이 조용히 검지를 펴며 손을 들었다. 그게 다였다. 쉬는 시간과 활동시간, 점심시간에 들어야 하는 엄청난 데시벨의 소음이 그곳 학교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미국의 초등학교에서 우리나라보다 더 엄격한 규율로 통제되며 수업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규칙을 반복해서 어긴 친구들은 교장실에 부모님과 함께 불려 가야 하니 규칙 준수가 잘 지켜지고 있었던 것이다. 학급의 규칙이 학교 전체의 시스템과 맞물려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부러웠다.


  아이들 대부분이 한국이 어디에 있는지 어떤 나라인지 알지 못했다. 담임교사에게 부탁해 한국에 대해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다. 수업을 준비해 한글을 알려주고 젓가락을 사용하는 법을 알려주기도 했다. 아이들 이름을 한글로 써주었는데 한글이 예쁘다며 너무나 좋아했다.


 그렇게 한 달간의 연수를 끝내고 무사히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8년 후 아들이 5학년이 되었을 때 테솔 대학원에 진학해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오랜만에 만난 교대 친구가 대학원에 진학한다고 같이 해보자고 한 것이다. 영어 연수가 끝나고 혼자 영어 공부하는 것이 시들 해질 때쯤 온 제안이라 반가웠다. 대학원 원서를 쓰고 면접준비를 해서 시험을 치렀다. 대학원 수업은 연수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과제가 많았다. 수업과정안이나 자료를 만들고 수업 시연을 해야 했다. 매일 과제 준비를 하느라 퇴근하고 오면 컴퓨터 앞에 자석처럼 붙어 앉아있었다. 그런 나를 보고는 아들이 "엄마가 누워서 드라마 보는 모습이 보고 싶다."라고 할 정도였다.


 남편이 출장 가고 나면 퇴근하고 혼자서 애들을 돌봐야 하니 힘에 부쳤다. 2학기를 수료하고 나니 체력이 달려 휴학하고 싶은 마음이 불쑥불쑥 올라왔다. 주변에서 지금 그만두면 아무것도 못한다며 응원해 주었다. 마음을 다잡고 심기일전해서 과에서 2등을 했다. 2등에게 주는 백만 원이 넘는 장학금이 참 반가웠다. 공개수업이 많아서 힘들었던 마지막 학기가 끝나고 테솔과정을 수료했다. 테솔자격증도 나왔다. 학기 초에 나를 소개하는 ppt에 테솔자격증 보유, 한국사 1급 자격증 보유라고 쓸 수 있는 글자가 생겨서 뿌듯했다. 물론 가장 좋은 선생님은 아이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선생님이지만 영어 전담을 할 때나 고학년 담임을 할 때는 공부한 내용이 도움이 되었다. 부모님들도 반 아이들도 노력의 결과를 좋아해 주었다.


 우리 집에서 내가 가방끈이 가장 다며 가끔 흰소리를 하곤 한다. 육아독립군에 일을 하면서 연수와 대학원을 병행하는 게 쉽지만은 않았다. 그 여정을 어떻게 잘 마무리했을까 생각해 보면 그 일을 좋아해서 가능했다. 마음에 꿈을 심고 열정으로 키우니 꽃을 피웠다. 잠시 시들때는 있을지언정 열매가 되기전에 꽃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가족들이 도와주어서 가능했다. 자꾸 일을 벌이는 내게 한 번도 '그런 꼭 해야 하냐, 안 하면 안 되냐'는 말을  하지 않았다. 다들 내가 하고 싶어 하는 일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해 주고 응원해 주었다.


 일이 없을 땐 일을 만들어 바쁘게 살았다. 게으르게 사는 것보다는 바쁘게 사는 게 마음이 편했다. 게으른 나의 본성을 거스르면서 살다 보니 이제는 절반의 부지런함이 생긴  같다.


 더 멋진 가 되기 위해 나는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 오랫동안 영어를 마음에 꿈으로 품고 살았듯 글쓰기나의 새로운 꿈이 되었다. 새로운 꿈을 품고 이전에는 되어 본 적이 없는 새로운 내가 되어보려 한다.


 열정과 꿈이 또 새로운 나를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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