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한 작업실, 그곳에서 피어난 노래
월 60만 원, 앨범 하나만을 위한 시간
‘발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을 그대로 품에 안은 채, 나는 졸업이라는 문턱을 넘었다.
졸업은 끝이 아니었다. 나는 마음속의 강박을 또 한 번의 ‘성취’로 이겨내야만 했다. 그 생각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더욱 거세게 밀어붙였다.
다른 모든 욕구는 사치라 여기며 억누른 채, 오직 작업실과 집만을 오가는 고립된 생활이 정답이라 믿었다.
당시 내 한 달 수입은 2018년도 최저시급(7,530원)을 받으며 주말 아르바이트로 버는 60만 원 남짓이 전부였고, 그 돈으로 어떻게든 앨범을 내야 한다는 생각에 악착같이 생활비를 아꼈다. 다행히 부모님께서는 여전히 나를 믿고 핸드폰 통신비만큼은 지원해 주셨고, 월급에서 작업실 월세 37만 원과 앨범 투자금 적금 10만 원을 빼고 나면, 내게 남은 돈은 10여만 원에 불과했다. 식사는 집에서 해결한다 해도, 그 돈으로 교통비와 최소한의 생활비를 감당해야 했다.
나는 이 기간, 아침 9시에 일어나 10시쯤 하루의 첫 끼니이자 마지막 식사가 될 밥을 양껏 먹었다. 그러고는 밤 11시 작업실에서 집에 돌아올 때까지, 그 어떤 음식도 입에 대지 않고 오직 물만 마시며 곡 작업에만 매달렸다.
다행히 작업실 또한 집과 멀지 않은 곳이어서 한 달 3, 4만 원 정도의 교통비만 나와 어느 정도 감당이 가능했다. 이렇게 해서 남은 금액은 6,7만 원 정도였기에 친구들과의 약속 또한 최대한 제한했다.
내가 이렇게 살아가는 동안, 친구들이 여행을 떠나고 새로운 경험을 쌓아가는 것을 보면서도, 나는 여전히 ‘음악가는 그래서는 안 된다’는 강박적인 사고의 틀에 스스로를 가두었다.
돌이켜보면 여유나 이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꽉 막힌 생각이었다.
그렇게 오롯이 음악에만 몰두하며 시간을 보냈고, 어느덧 계절은 바뀌어 2019년이 되었다.
2019년 2월, 우연히 찾아온 영감
2019년 2월, 나는 우연히 유튜브에서 본 4K 도시 야경 영상 속에서 어떤 거대한 감정의 파동을 느꼈다.
나는 이 영감을 잃고 싶지 않아서 곧바로 여의도 한강공원으로 달려가 영상 속 도시의 야경을 두 눈에 담았다. 그때, 2년 전에 끝났던 연애의 잔상이 문득 떠올랐다. 그 시절 연인과 주고받았던 마음들, 내가 받았던 것들과 주었던 것들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 습작 하나를 완성했다.
제목은 ‘At the night’.
특히 후렴구가 마음에 들었던 나는, 이 곡의 편곡 방향을 검정치마의 ‘Hollywood’ 같은 느낌으로 잡아보기로 했다. 레퍼런스에 맞춰 트랙을 가다듬었지만, 늘 그렇듯 내 작업물에 대한 자신감은 바닥이었다.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데모를 완성한 후, 미디를 가르쳐주던 동기를 찾아가 조심스레 들려주었다. 다행히 동기는 내 데모 트랙의 훅 부분을 특히 높게 평가해 주었고, 그제야 나는 안도감을 느꼈다.
사고와 탄생, 두 개의 이야기
한창 타오르던 내 창작열에 그 긍정적인 피드백은 기름을 들이부은 격이었다.
그러나 내가 이 불타오르는 마음으로 새로운 트랙 작업을 막 시작하려 할 때, 내 인생을 송두리째 흔드는 소식이 찾아왔다. 아버지가 대장암 3기라는 이야기였다. 그해 3월이었다.
어머니께 소식을 전해 들은 나는 이상하게도 눈물이 나지 않았다. 평소 스스로를 여리고 나약하며 대범하지 못하다고 생각했는데, 그 순간만큼은 내가 집안의 가장이라도 된 것처럼 이성적으로 상황을 판단하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수술 날짜를 두고 고민하는 어머니에게는 최대한 빨리 수술을 잡자고 단호하게 말씀드렸다. 소식을 듣고 우는 여동생에게는 "아직 아버지 돌아가신 거 아니야. 치료받으면 충분히 사실 수 있어. 울지 마."라며 오히려 동생과 어머니의 마음을 강하게 다잡아주었다.
그렇게 애써 가족들을 위로하며 내 슬픔은 속으로 꾹꾹 눌러 담았다. 아버지는 진단 후 2일 만에 수술대에 오르셨다. 나는 아버지의 몸에서 절제한, 암세포가 붙어있는 대장을 직접 보기도 했고, 수술 후 회복실에서 아버지를 곁을 지키기도 했다.
난 아버지가 의식을 차리는 순간을 아직도 기억한다.
마취에서 깨어난 아버지가 내뱉은 말은
"내가 돈을 벌어야 하는데...",
그리고 "회사 못 나가면 안 되는데..."라는 두 마디였다.
암 진단 소식에도 울지 않았던 나는, 아버지의 그 말을 듣는 순간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과 죄송함, 그리고 가슴 아픈 연민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아버지가 회복 후 통원 치료를 시작하시면서 집안이 조금씩 안정을 되찾자, 나는 다시 창작에 몰두하기로 했다. 어쩌면, 그래야만 했다. 그렇게 다시 시작한 음악 작업.
나는 'At the night'처럼, 다음 곡 역시 특정한 시각적 매개체를 통해 영감을 얻고 싶다는 고민을 동기에게 털어놓았고, 그는 뮤직비디오 하나를 추천해 주었다.
Sun Rai의 ‘San Francisco Street’라는 곡이었다. 영상은 특별할 것이 없었다. 자동차 블랙박스로 찍은 듯, 그저 고속도로를 무심히 주행하는 단순한 풍경의 반복.
그 단조로운 영상을 멍하니 바라보며 나는 문득 ‘교통사고’라는 극단적인 상황을 떠올렸다.
‘만약 고속도로에서 사고가 난다면, 사람은 어떤 감정을 느낄까?’
극한의 상황에 놓인 인간의 심리가 궁금해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그런 상황에서는 몸에 엔도르핀이 분비되어 고통의 강도를 줄여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곧바로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내가 만약 사고 피해자라면? 엔도르핀은 어쩌면, 흐려지는 내 의식에게 ‘일어나!’라고 소리치는 마지막 절규가 아닐까. 마치 119 구급대원이 의식을 확인하려 외치는 소리처럼 말이다. 이런 생각들을 한데 엮어, 몸이 차갑게 식어가는 순간의 감각을 담은 곡 ‘체온’이 탄생했다. 어쩌면 당시 아버지의 투병을 곁에서 지켜보며 느꼈던 절박함과, 감정적으로 한계인 상황이 나아지길 바랐던 작은 희망이 이 곡에 투영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체온’을 만들던 몰입의 시간 속에서, 또 다른 곡 ‘0221’이 마치 쌍둥이처럼 함께 태어났다.
이 곡은 정반대로 ‘탄생의 순간’에 대한 상상에서 시작되었다.
만약 갓 태어난 아기에게 의식이 있다면, 세상과 처음 마주하는 그 순간은 어떤 느낌일까?
내 생각에,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병실 천장의 하얀 형광등 불빛일 것 같았다.
그렇다면 그 아기에게 이 세상의 하늘은 온통 ‘흰색’으로 기억되지 않을까.
이런 엉뚱하지만 진지한 가정에서 출발해, 나의 생일이기도 한 ‘0221’이라는 제목의 곡을 완성했다.
나는 완성된 세 곡을 들고 다시 동기를 찾아갔다.
첫 곡 ‘0221’을 들을 때부터 동기의 표정과 감상하는 공간의 공기마저 미묘하게 긍정적으로 달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마지막 곡 ‘체온’의 트랙이 끝났을 때, 내 동기이자 미디 작곡 선생님은 짧은 감탄사와 함께 아무 말 없이 내게 악수를 청해왔다.
그 순간, 수없이 많은 감정과 기억들이 한꺼번에 나를 덮쳤다. 나는 왈칵 쏟아지려는 눈물을 억지로 삼켰다.
이것은 단순히 내 음악이 ‘인정받았다’는 기쁨만은 아니었다.
그 한마디 칭찬 속에, 이 앨범을 완성하기까지 내가 겪어온 모든 고생과 절박했던 시간들까지 함께 위로받는 듯한 기분, 그리고 과거 나를 옥죄던 강박과 위태로웠던 사건들의 기억까지 한데 뒤섞여, 말로는 도저히 형언할 수 없는 벅찬 감동이 되어 밀려왔다.
돌이켜보면, 그때가 내 음악 인생에서 가장 짜릿한 창작의 카타르시스를 느꼈던, 그리고 또 한 번의 ‘성취’를 경험했던 순간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렇게 세 개의 트랙을 묶어, 나의 첫 EP ‘At the night’이 세상에 나올 준비를 마쳤다.
5개년 계획의 두 번째 목표였던 ‘앨범 발매’를, EP의 형태지만 나는 그렇게 2019년 4월에 이루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