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돌이표처럼, 다시 음악으로
하지만 마냥 손을 놓고 있을 수만은 없다는 생각이 들어,
부족했던 보컬 실력을 다지기 위해 뮤지컬 발성 레슨을 받으며 연습에 시간을 쏟았다.
그렇게 2020년의 첫 달을 보내면서, 나는 익숙한 결론으로 다시 돌아왔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결국 다음 작품을 만드는 일뿐이라는, 마치 도돌이표 같은 결론이었다.
거대한 재앙 앞에서는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이 지극히 사소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밖이 아닌 안으로, 거대한 세상이 아닌 가장 작은 공간으로 시선을 돌렸다.
문득 처음 ‘공간 3부작’을 기획했을 때 마지막 편으로 남겨두었던, ‘겨울철 따뜻한 방 안’이라는 콘셉트가 떠올랐다.
그 작고 개인적인 공간 안에서 내가 느끼는 감정의 파동들. 그 모든 것을 담아낼 세 번째 EP, ‘현상(現象)’의 작업을 그렇게 시작했다.
세 번째 EP는 그동안 쌓아두었던 나의 습작들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네 곡을 긁어모아 새롭게 편곡해 만드는 작품이었다.
소년의 하늘, 그리고 사랑의 색깔
첫 번째 트랙은 이전 EP의 ‘0221’에서 이어지는 이야기였다.
탄생의 순간, 하얀 형광등을 세상의 전부이자 하늘이라 믿었던 그 아이. 나는 문득 그 아이가 자라 소년이 되었다면 세상을 어떤 눈으로 바라볼지 상상해 보았다.
그 상상은 이내 거울처럼 나 자신을 비췄다. 그렇다면 나라는 소년은, 그 시절 어떤 마음으로 세상을 살았을까?’ 그리고 어른이 된 지금의 나는, 기억 속 그 소년을 마주 보며 무엇을 느끼는가.
나는 그 겹겹의 질문과 아련함, 스스로의 마음을 들여다볼 때의 그 모든 감정을 하나의 곡에 담아내기로 했다.
두 번째 트랙은 내가 생각하는 ‘사랑’에 대한 노래였다. 진정한 사랑이란 외적인 모습이나 내면의 감정으로 사람을 가득 채워, 그 거대한 감정으로 따뜻한 안정감을 주는 것이라 생각했다.
사람들은 보통 사랑의 색으로 분홍이나 빨강을 떠올리지만, 나는 문득 바다를 생각했다. 지구의 수많은 것을 말없이 품어주는 드넓은 바다의 색은 파란색이 아닌가. 나는 그 깊고 모든 것을 포용하는 ‘짙은 파란색’이야말로 사랑의 진짜 색깔일지 모른다고 믿었다.
이 곡은 의도적으로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작업했다. 나는 일부러 더 빠르고, 더 쉽게 만들고자 마음먹었다. 기존에는 한 음, 한 라인에 모든 신경을 곤두세우며 지쳐 쓰러질 때까지 삭제와 재녹음을 반복했다. 그런 방식은 필연적으로 극심한 감정 소모를 동반했다.
그래서 이번 EP에서는 적어도 한 곡만큼은, 머리가 아닌 마음이 이끄는 대로 직관적으로 완성해보고 싶었다. 그 가벼워진 마음 덕분이었을까, 곡의 전체 뼈대는 거의 일주일 만에 완성되었다.
물론, 이 곡이 진정으로 완성된 것은 동기 대현이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마지막을 장식하는 그의 기타 솔로가 더해지는 순간, 나는 비로소 이 곡이 제 모습을 찾았다고 느꼈다. 어쩌면 나는 그의 연주 덕분에 이 곡을 더 빨리 완성시킬 수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Don't waste it. Don't waste your life.”
이렇게 세 번째 EP 작업을 구상하던 어느 날 밤, 나는 완성된 두 번째 EP의 트랙들을 다시 한번 들어보았다. 그러다 '공간'의 마지막 가사가 귓가에 선명히 박혔다.
‘오랫동안 무너지던 나’ , '오랫동안 울고 있는 나.'
그 가사를 곱씹는 순간, 날카로운 의문들이 나를 덮쳤다.
‘사람들이 과연 이런 내밀한 이야기를 궁금해할까?’
‘내 음악을, 내 마음을, 정말 듣고 싶어 할까?’
그날 밤, 수많은 사념들이 폭풍처럼 내 머릿속을 헤집고 다녔다. 이 지독한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나는 하나의 가설을 세웠다.
‘어쩌면 내 음악의 한계는, 내가 다른 사람들의 삶을 모르기 때문은 아닐까? 만약 내가 그들의 마음과 가치관을 이해하게 된다면, 내 음악도 더 넓은 세상에 가닿을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이 가설을 직접 증명해보고 싶었다. 코로나 시절이라 쉽지는 않았지만, 인터넷을 뒤져가며 어렵사리 오프라인으로 열리는 곳을 찾아냈다. 가입비가 있는 유료 플랫폼을 통해 운영되는, 철학과 가치관을 공유하는 작은 모임이었다. 나는 용기를 내 그 낯선 모임에 나갔고, 나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그곳에는 다양한 직군의 직장인들, 스스로 사업을 하는 분, 그리고 취업 준비생까지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과 대화하며 나는 몇 가지를 깨달았다.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나처럼, 자신만의 가치관을 찾기 위해 여전히 헤매고 있다는 것. 그리고 사람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하는 만큼이나, 타인의 생각을 궁금해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새삼 느꼈다. 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도 위대한 일인지를. 내 음악이 대중의 마음에 가닿는다는 건, 어쩌면 미지의 영역 일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생각마저 들었다.
그렇게 작업실로 돌아와, 나는 세 번째 EP ‘현상(現象)’의 세 번째 트랙 작업을 시작했다.
주제는 ‘겨울철 따뜻한 방 안’, 그 안에서 교차하는 사람들의 감정과 나의 감정들이었다.
모임에서 나눈 수많은 대화 속에서 나는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낭비하는 삶’을 생각보다 굉장히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인생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는 그 절박함이, 때로는 스스로를 몰아붙이고 또 때로는 다독이며 어떻게든 앞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원동력이었다.
그 필사적인 모습들이, 문득 내 머릿속에서 영화 <아이언맨 1>의 한 장면과 겹쳐졌다. 동굴 속에서 토니 스타크의 탈출을 도와주다 죽어가던 잉센 박사가 남긴 마지막 말.
“Don't waste it. Don't waste your life.”
(낭비하지 말아요. 당신의 인생을.)
어쩌면 우리 모두의 가장 깊은 내면(잉센)이, 불안한 현실을 살아가는 겉모습의 나(토니 스타크)에게 끊임없이 속삭이고 있는 건 아닐까.
‘네 삶을 낭비하지 마.’
나 역시, 다르지 않았다.
나는 이러한 깨달음을 담아 세 번째 트랙의 제목을
‘Don’t waste it’으로 정했다.
작업 방식은 ‘공간’을 만들 때처럼 나 자신을 3인칭 시점으로 바라보는 것이었지만, 이번에는 감정의 날것을 조금 더 직관적으로 들여다보기로 했다.
‘삶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스스로를 몰아붙이다가도, 마음에 드는 결과물이 나오면 어린아이처럼 기뻐했다. 하지만 어떤 날은, 트랙이 도무지 완성되지 않아 작업실에 앉아있는 모든 시간이 지긋지긋하게 느껴졌고,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깊은 무력감에 빠져들었다
가끔은 그런 감정에 북받쳐 울기도 하고, 소리를 치기도 했다. 심지어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 내 음악가로서의 삶에 지쳐, 스스로의 몸을 때리는 극단적인 행동을 하기도 했다.
나는 이 모든 롤러코스터 같은 감정의 파편들을, 위태로운 나의 모습을, 이 곡에 그대로 투영해 냈다.
그렇게 내 안의 가장 위태로운 감정들을 모두 표현하고 나니, 이상하게도 마음이 조금은 차분해졌다.
그리고 오랫동안 내 악보 공책 속에 잠자고 있던 미완성의 습작 하나를 끝마칠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
‘Your color’라는 이름의, 아주 오래된 노래였다.
그 마지막 조각을 채워 넣음으로써,
나는 마침내 세 번째 EP ‘현상(現象)’을 완성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