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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산 Oct 12. 2023

2주 3일.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다


이정표는커녕 명확한 길조차 보이지 않았지만, 운명의 갈림길을 또 하나 지나갔음은 분명하다. 정확한 시점은 알 수 없지만, 월경 2주 차 언저리에서 배란했을 것이다. 수정이 되었든 안 되었든 그건 이미 결정된 것이고 지나버린 일이다. 따라서 기도 같은 것도 할 필요가 없으며 그저 남은 2주를 열심히 살며 기다리면 된다. 우린 최선을 다했으니까.


만약 수정되었다면 월경 2주 3일이 되는 오늘은 대략 배아 나이 3일이 된다(월경 주기가 28일인 여성 기준). 우리가 난임 병원에서 시험관 아기 시술을 받으면 '3일 배양' 혹은 '5일 배양' 수정란을 이식한다고 하는데, 이때 말하는 날짜가 배아 나이이다. 시험관 아기 시술은 내가 임신 몇 주인지 가장 정확하게 알 수 있다. 수정일(발생 0주 0일)이 임신 2주 0일, 3일 배양 배아를 이식한 날이 발생 0주 3일이자 임신 2주 3일이기 때문이다.


물론 3일 동안 키웠으니까 3일 배양 배아라는 걸 당연히 알지만, 특징적인 모양으로도 이 배아가 3일 정도 되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수정일. 부모의 염색체를 각각 반쪽씩 가진 두 세포가 만나 그들과 닮으면서도 다른 새로운 한 세포를 만든다. 그것은 그야말로 작은 대 창조!

1일 차. 수정란이 둘로 나뉘어서 '2세포기' 배아가 된다.

2일 차. 2개의 세포가 또 둘로 나뉘어서 '4세포기' 배아가 된다.

3일 차. 세포들이 둘로 나뉘어 '8세포기' 배아가 된다. 시험관 아기 시술 시 보통 이 단계에서 배아를 자궁에 이식한다.


따라서 현미경으로 봐서 배아를 이루는 세포의 개수가 7~8개 정도 되어 보이면 3일 된 배아라는 걸 알 수 있다. 현미경으로 세포 수를 세는 마지막 모습이기도 하다. 물론 다음은 '16개, 32개...'라는 식으로 증식하겠지만 '16(32)세포기'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쯤 되면 작은 공간에 세포가 빽빽하게 들어차 하나의 덩어리가 되기 때문이다. 이를 뽕나무 열매(오디) 모양을 닮았다고 해서 '상실배 (morula)'라고 한다. 사람을 만들 '생명의 반죽'이 준비가 되었다는 것이다.


수정 후 배아의 발생 과정을 보면 인도의 옛이야기가 생각난다. 어떤 사람이 체스와 유사한 게임을 만들었는데, 왕이 아주 마음에 들어 그에게 상을 주겠다고 했다는 이야기이다. 발명가는 "그렇다면 체스판의 첫째 칸에는 쌀 1톨을, 둘째 칸에는 2배인 2톨을, 셋째 칸에는 그의 2배인 4톨을, 이런 식으로 다음 칸마다 2배만큼 쌀알을 챙겨주시옵소서"라고 했다고 한다. 왕은 '1+2+4+8+16...' 정도만 대충 계산해 보곤 "원하는 게 겨우 그것뿐이냐? 소박하구나"라고 말하며 신하에게 발명가가 원하는 만큼의 쌀을 챙겨주라고 하였다. 그러나 마지막 64번째 칸까지 가면 쌀이 9,223,372,036,854,775,808톨이므로 나라가 파산했다는 훈훈한 수학적 교훈을 주며 이야기는 끝난다.


나 또한 시작은 고작 세포 하나였다. 하루를 꼬박 투자하여 세포 2개가 되는 미약한 발달이 며칠만 지나도 운명적인 변화를 만든다는 사실은 알면서도 참 경이롭다. 어쩌면 우리 부부에게도 작은 운명 하나가 이미 찾아왔을지도 모르겠다는 기대를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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