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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산 Oct 06. 2023

1주 6일. 그래도 아직은 쓸만하네요


정액검사에서 중요한 개념은 '정상'의 기준치가 '평균'이 아니라 '하위 5%'라는 거다. 그 말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정액검사가 정상이어도 여전히 '노력'이 많이 필요할 수 있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반대로 어지간한 정도의 정액으로도 임신이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실제로 정액검사 결과와 임신 성적은 100% 일치하지 않는다. 정자 수가 너무 적어서 한 번 더 재검해 보기로 했던 분이 다음 달에 아내가 자연 임신하여 내원한다든지 같은 일이 종종 일어나기도 하니까. 하지만, 그래도 내 정자가 실하게 움직이는 걸 확인하면 뭔가 안심이 되는 법!


내가 아무리 의사라도 맨눈으로 정자를 볼 순 없으니, 정액검사는 현미경이 필수이다. 마침 병원엔 현미경이 있다. 그러니 내 정액검사 정도는 스스로 확인하면 된다. 다만, 신경 쓰이는 점은 병원은 내가 일하는 직장이라는 것, 그래서 아는 사람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첩보 작전만큼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계획을 세우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정자는 생각보다 오래 살아있기 때문에 출근 시간 정도는 버텨줄 것이다. 그럼 정액 채취 정도는 집에서(?) 하지 뭐. 원칙적으로는 조금이라도 변수를 줄이기 위해 갓 짜낸(?) 신선한 정액으로 검사하는 게 좋지만 말이다. 그러나 '직장'에서 누가 알게 되는 건 정말 끔찍한 일이다. 현미경으로 정자를 보고 있는 것조차도 누가 "선생님. 오늘 접수된 정액검사가 없는데, 이건 누구 거예요?"라고 물으면 요령이 없는 난 자연스럽게 둘러대지 못하겠지. 어떤 소문이든 5분 이내로 전 직원에게 다 퍼지는 작은 병원에서 그 뒤에 벌어질 일은 별로 상상하고 싶지 않다. 사실 병원에서 검진용 혈액검사도 하고 소변검사도 하는데, 정액검사도 못 할 건 없겠지만, 나만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거라면 심히 곤란하다.


그리하여 여느 때보다 일찍 도착한 병원. 푸르스름한 아침 햇살이 경건하게 느껴진다. 오늘의 난 모든 번뇌를 내려놓고 인생이 허망함을 깨달은 몽롱한 현자...는 개뿔. 남들이 안 볼 때 얼른 정액이 담긴 컵을 꺼내어 후딱 현미경으로 확인해 본다. 과연 결과는?


'음... 이 정도면 그럭저럭 나쁘진 않네.'


이게 끝이다. 정식으로 하는 정액검사는 이보다 좀 더 자세히 보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는 정도. 괜찮으니 다행이지만, '역시나'라고 해야 할지 좀 허탈한 느낌도 든다. 그렇지만 괜히 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한 번쯤은 확인해 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정액검사를 받는 남편들은 대부분 내 또래였다. 나보다 조금 어릴 수도 있고, 좀 더 나이가 많을 수도 있지만, 어차피 비슷한 처지다. 한편, 이들의 정액을 보다 보면 생각보다 '정상' 판정을 주기 어려운 경우가 종종 관찰되는데, 그걸 보면 '난 괜찮나?'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 수밖에 없었다. 임신이 안 되는 사람만 병원에 오니까 그런 건가 싶기도 하지만, 다들 여느 '평범한 남편'인 만큼 우리 나이대가 원래 그런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솔직히 땀에서조차 정자가 검출될 것 같은 10대 후반 ~ 20대 초반 애들은 이 검사를 할 일이 없을 테니까 말이다. 늙어가는 또래 수컷을 보며 이젠 젊다고 하기엔 어색해지고 있는 내 나이를 실감하곤 한다.


뭐 그래도 힘을 내야지! 내 정자는 아직 쓸만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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