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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산 Oct 08. 2023

2주 1일. 조언보단 공감해 주기


지금은 유튜버가 되어버린 산부인과 선배의 말이 생각난다. 전공의 시절, 임신이 잘 안되어서 고민하는 지인에게 그녀는 이렇게 조언했다고 한다.


"원래 임신은 그냥 노력으론 안 돼. 노력했다고 하길래 물어보면 실제론 고작 가임기에 몇 번밖에 안 하고선 "왜 안 돼요?"라고 말하는 사람 많다니깐? 띄엄띄엄하지 말고 가임기에 매일 융단폭격으로 퍼부어야 임신하지! 남편한테 맛있는 거 먹이고 힘 좀 내보자고 해~ 매일 하고, 하루에 2번도 하고, 계속해 봐."


아직 결혼도 하기 전이었던 20대엔 그녀의 조언이 맞는다고 생각했다. 다소 표현이 과격한 면은 있으나, 교과서에서도 "배란 5일 전부터 매일 해보세요"라고 하니까 아주 많이 틀린 말은 아닌 셈이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지금. 다소 늦은 나이에 임신을 시도해 보니, 역시 선배의 조언은 난임 부부를 그다지 공감하지 못한 말이었다는 생각이 절실히 든다. 또한, 선배는 여자니까 남자의 성적 흥분을 너무 쉽고 당연하게 생각하셨던 것 같다. 우리 여성은 달아오르는 데 오래 걸리는 복잡 미묘한 존재이지만, 너희 남성은 '쉽게' 세울 수 있는 거 아니냐는 거겠지. 일단 세우면 그 뒤는 어찌어찌하면 되니까? 그러니 '매일 해보고 얘기해라'라는 무서운(?) 조언을 농담같이 했던 것 같다. 하긴 10년 전이면 선배도, 그녀가 만났던 남자도 아직 어릴 때였으니.


나도 결혼 전엔 임신 시도는 부부가 사랑이 충만한 상태로 분위기를 한껏 잡고 어떤 경건한 의식하에 거행하는 거로 생각했다. 나중에 '아이야, 엄마, 아빠가 이렇게 널 사랑으로 낳았단다'라고 기억할 수 있는. 아무래도 난 머리가 좀 꽃밭으로 가득했던 게 틀림없다.


그러나 30대 후반의 현실은 절대 녹록지 않았다. 우린 각자의 일이 너무 바빴고 늘 피로에 절어 있었다. 가임기를 챙기려고 해도 난 허구한 날 병원 당직이 있어 병원에서 자는 날이 많았다. 모처럼 퇴근해서 집에 가면 그냥 씻고 자고 싶었다. '이렇게나 성욕이 바닥이라니! 내 아랫도리가 퇴화해서 중성이 되어버린 건 아닌지?' 같은 고민조차 사치였다.


부부관계도 교과서대로 매일 하기는커녕, 이틀에 한 번 하는 것도 너무 벅찼다. 하루는 아내가 씻는 걸 기다리다가 내가 그만 잠들어 버린 적이 있었다. 깜빡 잠들었다고 생각했는데, 화들짝 눈 떠보니 불은 다 꺼져있었고 어둠 속에서 아내는 울고 있었다. 놀라서 무슨 일이라도 있냐고 물으니, 아내는 내가 너무 피곤해 보여서 차마 깨울 수가 없었다고 했다. 아뿔싸! 난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고 덕분에 좀 쉬었으니 오히려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아내를 다독였지만, 아내는 이미 흥이 식어버렸다고 돌아누워 버렸다. 등 뒤로 아내는 말했다.


"그래 물론 피곤하겠지. 하지만, 어떤 때 보면 나만 노력하는 것 같아."


"..."


아내가 서운한 건 알겠지만, 가끔 이렇게 하나를 가지고 전부를 매도하는 듯한 표현을 들으면 나도 나름으로 노력했던 것들은 뭐가 되는가 싶어 마음이 상했다. 가임기였고 분명 오늘 해야 할 것만 같았지만, 나도 이 기분으론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나도 셀프 정액검사도 하고 (민망하여 아직 아내에게 얘기하지 않았음) 여러모로 신경 쓰고 있단 말이야. 하지만, 그런 걸 따져서 해결될 일이 아니니 속으로 삭이다 잠들었다. 그렇게 그날 밤은 별일 없이 그냥 넘겼다.


매일 부부관계 하는 게 쉬운 일이면 사람들이 왜 '숙제'라고 하겠는가. 그러니 난 난임 부부에게 조언보단 공감을 더 말해주고 싶다. "이렇게 때맞춰서 열심히 하면 될 텐데 못 하겠어요?"라고 말하기보단, "아 그거 어렵죠? 사실 저도 잘 못 해요. 전 저만 못 하는 줄 알았는데, 직업상 남들 하는 거 들어보니까 다들 비슷하더라고요. 쉬운 게 아닌 거 맞으니까 너무 자책하지 말아요."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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