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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산 Oct 04. 2023

1주 5일. 남자의 마음은 섬세해요


한 부부가 난임 검사를 위해 내원했다. 아내는 부인과 검사를 받으러 갔고 남편은 정액을 제출한 뒤 결과 상담을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여느 상담들이 다 그렇겠지만, 의사는 진료실에서 환자와 만나기 전에 그의 검사 결과를 미리 살펴보고 할 말을 정리해 놓는다. "자! 어디 한번 열어볼까요?"라는 식으로 환자와 같이 결과지를 처음 확인하는 의사는 없을 것이다. 환자를 앞에 두고 결과지를 보면서 그제야 "어... 음..." 하면서 해석하고 있는 것도 굉장히 모양 빠지는 일일뿐더러 서로에게 굉장히 비효율적인 시간 낭비기 때문이다. 차라리 환자는 진료실 밖에서 좀 더 기다리는 것이 좋다. 게다가 가끔은 예상치 못한 결과도 나오기 때문에 의사도 혼자 고민해 볼 시간이 필요하다. 지금 같은 경우처럼 말이다.


"어? 뭐야. 정액에 정자가 한 마리도 없잖아?"


정액검사는 현미경으로 정자의 수, 움직임, 모양 등을 보는 검사이다. 정자는 대략 몇 마리 정도 되는지, 그중 몇 마리나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는지, 기형이 없는 완벽한 정자는 몇 마리인지 말이다. 그런데 그런 걸 보려면 일단 정액에 정자가 있긴 해야 하지 않은가! 정액량이 비록 좀 적긴 했지만, 그래도 검체 채취용 컵 바닥에 고일 정도의 양은 받아져 있었다. 이건 뭐지? 어떻게 뽑아낸 거지?


처음 겪는 일이라면 당황해서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막막했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이전에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이런 경우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정말 비뇨기과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이고, 아니면 도저히 병원에선 사정이 되지 않아 억지로 뽑아낸 경우이다. 따라서 '무정자증'으로 섣불리 단언하기 전에 혹시 후자는 아닌지 항상 살펴봐야 한다.


일단 남편에겐 결과를 있는 그대로 설명해 드릴 수밖에 없다. 마침 아내가 진료 중이라 자리에 없는 게 차라리 다행이지 않을까. 그리고 남편에게 물어보았다.


"혹시 정액채취실이 어색하고 불편해서 검사하는데 매우 힘들지 않으셨어요?"


남편은 풀이 죽은 목소리로 "네..."라고 겨우 대답했다.


"확실히 병원은 생소한 곳이고, 게다가 여자들만 간다고 생각했던 산부인과에서 검사받는 건 어떻게 해도 마음이 편하지 않을 거예요. 그래서인지 실제론 정상인 사람도 이런 경우가 간혹 생기더라고요. 그래서 이걸로 바로 '무정자증'으로 진단해 버리는 건 아니에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 비뇨기과도 한번 상담받아 보시고요. 우리 조금 쉬었다가 다른 날에 한번 다시 검사해 봅시다."


내가 환자에게 진심으로 공감해 줄 수 있는 이유는 정액채취실이 정말 기분이 구린 곳임을 알기 때문이다. 어떻게 아느냐고? 혹시 몰라서 (?) 나도 한번 들러봤으니까.


정액채취실은 오로지 정액을 컵에 담기 위해 만들어진 방이다. 따라서 쓸데없이 클 필요가 없다. 사람 한 명만 들어가면 되는 작은 방. 그래도 실내장식은 환자를 생각하여 열심히 꾸며 놓는다. 소파를 놓는 병원도 있고 간이침대를 놓는 병원도 있고 정해진 건 없지만, 사실 뭘 놓아도 불편한 건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쩌면 이 공간 자체가 근원적으로 불편한 걸지도 모른다.


정액 채취를 위해선 아무래도 약간의 의욕이 필요한데, 이를 도와주는 매체가 방에 구비되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옛날엔 병원마다 나름대로 영상 같은 걸 준비 해놓았다고 하던데, 영상은 저마다 달라도 신기하게 하나같이 다 도움이 안 된다는 공통점이 있었다고 한다. 요즘은 다들 스마트폰이 있으니 병원도 더는 따로 준비하지 않는다고 한다. 기술의 발전이란 놀랍구나!


참고로 내가 근무하는 병원의 정액채취실엔 오래된 책 한 권이 놓여 있을 뿐이다. 아무도 건들지 않는 호텔 방 성경처럼 두꺼운 양장본으로 제목은 『사랑과 성, 그리고 섹스』라고 적혀있다. 설마 하며 펼쳐보면 아니나 다를까 '사랑이란 무엇인가?'부터 시작한다. 장담하건대 이걸로 사정할 수 있는 사람은 정액검사를 굳이 받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난 호기심에 몇 장 읽어보다가 스르르 잠들 뻔했다. 누가 이런 끔찍한 책을 여기 둔 건지 원...


아무튼, 병원이 최대한 배려를 해주긴 해도 정액검사가 생각만큼 쉬운 건 아니다. 남자는 생각보다 부끄럼이 많고 섬세하니까. 게다가 나이 든 남자는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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