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보다 아름다운

아네씨 호

by 서쪽하늘



어젯밤 갑자기 그림 속 풍경이 보고 싶어서 밤에 론강에 가보자고 했다.
"외국에서 밤에? 위험하지 않을까?"
딸이 혼자 갔다 오라고 해서 안 간다고 했다.

자려고 누웠는데 어쩐 일로 어쩐 일로 생생했다. 밤 10시가 넘었는데 골목에서 아이들 뛰어노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릴 듣더니 딸이 괜찮을 거 같다고 해서 바로 옷을 주워 입고 론강으로 갔다.

똑같지는 않았지만 하늘에 별이 여러 개 보였다. 봤으니 됐다. 돌아와서 잠이 들었던가. 요란하게 문 두드리는 소리에 둘 다 깼다. 집주인이 내일 나갈 때 열쇠는 어디다 두고 가라는 말을 하고 갔다. YY



나무들 안녕. 네 번째 보는 론강도 이젠 진짜 안녕.

아를역에 도착했는데 전광판에 우리가 탈 기차가 안 보이고 역무원도 없었다. 또 딸은 검색검색. 나도 용기 내 물어봤다. 그저 '익스큐즈 무아'하고 휴대폰 파파고를 들이댔을 뿐이지만.

기차가 2시간 후에야 온다는 거다. 프랑스 기차가 그렇다고 듣긴 했지만, 아직 겪어 본 적 은 없었는데. 기차환승도 해야 하는데. 버스로 갈아타려다 2시간 후 기차를 타는 게 안전할 것 같아 아침을 먹으러 이동했다.



또 빵이다. 안 괜찮지만 괜찮다. 이젠 주식이 된 느낌이랄까. 짭짤한 걸 먹고 싶어서 햄버거를 택했는데 돼지고기가 차가워서 빼고 토마토랑 야채만 골라먹고 그나마 빵도 남겼다. 다른 빵을 하나 더 사길 잘했지.



9시 47분 기차는 제시간에 왔다. 감격. 택시 타러 간다던 애리조나에서 온 모녀도 택시를 못 잡았는지 기차에 올랐다. 다시 반갑게 인사. 기차가 론강옆으로 지나가서 론강을 보며 갔다. 양귀비가 이렇게 많이 피어서 모네도 많이 그렸나 보다. 딸은 기차에서 자고 난 각성제라도 먹은 듯 눈을 부릅뜨고 풍경을 눈에 새겨 넣었다.



기차를 갈아타기 전 과자를 사고 화장실을 찾았다. 여자표시가 되어 있는데 남자가 있었다. 내 앞에 여자들도 화가 난 것 같았다. 내 차례가 되어 들어갔더니 변기가 깨끗하지 않아서 대충 해결했다. 이래서 일회용 시트커버를 가져가라는 거였군. 가져오긴 한 것 같은데 그동안 쓸 일은 없었다.

노트북과 책을 꺼냈지만 여전히 책에 집중하지 못했다. 스쳐가는 집들이 풍경이 예뻐서. 읽고 있는 헤르만 헤세 책은 속초 책방에서 샀다. 가장 처음에 나오는 단편 <청춘은 아름다워>는 고향에 잠시 쉬러 온 이야기인데 꼭 지금 내 앞의 풍경같이 정겹다. 평온하고 달콤한 이야기다 지금의 나처럼.

오늘 점심은 역에서 산 요플레와 과자. 아들이 연탄이 영상을 보내왔다.



내가 찍었다고 믿기 힘든 예쁜 풍경이다. 딸은 눈 덮인 산을 찍었다. 스위스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스위스에서 내리 비가 온다고 해서 실망하고 있던 순간이라.



아네씨 도착. 세 번째 숙소인데 가장 마음에 들었다. 있을 거 다 있고 창밖 풍경도 좋았다.
커피도 있고 특히 환영의 메시지까지 있어서 감동받았다.



아네씨에 호수가 있다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 예쁠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프랑스 사람들이 살고 싶어 하는 곳이라고 해서 한적한 줄 알았더니 관광객으로 북적였다.


노부부가 지나가다가 사진을 찍어준다고 했다. 찍어주고 가면서 내가 입은 티셔츠를 가리키며 좋아했다. 딸이 사온 티셔츠엔 'merci'라고 쓰여있었다. 뜻은 프랑스어로 '감사합니다'


그럼에도 경치에 매료되어 눌러살고 싶을 지경이었다. 이틀만 머문다는 게 아쉬웠다.

내일 패들보드를 탈건데도 눈앞에 보트가 보이니 타고 싶긴 했다. 눈치챈 딸이 타자고 했다. 발로 밟아야 가는 거라 딸이 고생 좀 했다. 내일 다리 아프겠네.


두둥실 떠서 믿기 힘든 풍경을 보고 있으니 천국이 따로 없었다.

"행복하네"



마트에 가서 계란 몇 개를 샀다. 샤워를 하고 나오니 딸이 계란찜을 만들어놨다. 라면국물에 넣은 거랑 그냥 이랑. 자주 먹어야지 맛있네.
사과도 싸게 샀다. 늦게까지 이야기를 했다. 졸지 않고 말짱한 정신으로. 이제 좀 적응이 돼 가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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