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을 하고 하루 종일 끼고 살았던 노트북 앞에 다시 앉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다시 키보드 앞에 앉습니다. 오늘도 꽤 많은 활자를 보고, 썼습니다. 출근길에는 늘 책을 읽거나 뉴스들을 읽습니다. 빈틈없이 활자들을 정독하고 나면, 이제 문장을 쓸 차례입니다. 기자로 살면서, 매일 많은 기사들을 씁니다. 문장을 쓰고 나면, 한 번 다시 다듬고의 반복입니다. 그리고 다시 퇴근길. 읽던 책을 다시 펴고 버스에 오르거나, 지하철에 오릅니다. 너무 사람이 많으면 휴대폰으로 뉴스를 읽습니다. 매일의 반복입니다. 그리고 집에 오면 다시 키보드 앞에 앉아 손을 풉니다. 이제 제 글을 쓸 차례입니다. 하루 종일 머릿속을 떠다니던 생각의 구름들을 한군데로 집중합니다. 타닥타닥. 키보드를 치기 시작합니다.
“왜 글을 쓰냐?”라는 질문을 많이 받습니다. 말을 잘 못해서 글로 풀어 쓰는 걸 좋아한다고 자주 답합니다. 그런데 원래 글을 써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입니다. 아마 중학교 때 국어 선생님의 영향이 가장 컸을 겁니다. 중학교 1학년 때, 국어 선생님이 마음에 드는 시를 필사해오라는 숙제를 내줬습니다. 그때 읽어봤던 시라고는 교과서에 나왔던 시 밖에 없었으니, 열심히 포털 사이트를 뒤졌습니다. 그 결과 찾았던 장정일 시인의 <햄버거에 대한 명상>을 필사해 갔습니다. 햄버거 만드는 레시피로 시를 썼다는 게 흥미를 끌었습니다. 국어 선생님이 마음에 드셨나 봅니다. “너는 왜 이 시를 가져왔니?”라고 물어보는데, “느낌이 좋아서”라고 답했습니다. 칭찬을 들었는데, 무슨 칭찬인지 기억은 안 납니다. 그 칭찬이 좋아서 자주 시를 찾아 읽었습니다.
고등학교 때는, 사실 공부에 크게 취미가 없었습니다. 소설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면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중학교 3학년 시절, 김지운 감독의 <달콤한 인생>을 보고 영화감독의 꿈을 키웠던 시기였습니다. 자율학습 시간은 제게는 지옥 같은 시간이었습니다. 흥미도 없는 교과서들로 공부를 해야 했으니, 답답했습니다. 이미 수업 때 공부한 내용을 다시 복기하는 것도 귀찮았던 탓이 큽니다. 그래서 국어 문제집과 교과서에 나오는 소설들을 읽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당시 교과서에 나왔던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은 거짓말을 조금 보태서 100번은 넘게 읽었습니다. 그렇게 공부는 안 하고 시와 소설을 읽고 영화만 보던 인간은 대입 과정에서 수많은 연극영화과에 지원했지만 떨어졌고, 문예창작학과로 좌천됐습니다.
‘영화는 4년 동안 혼자 독학했으니, 시나리오를 열심히 쓰면 되겠지’라고 생각했습니다. 근데 웬걸. 대학을 다니고 공익근무요원을 하던 6년의 시간동안 시와 소설, 수필만 엄청나게 써댔습니다. 이게 아마 지금도, 글을 쓰는 걸 멈추지 못하는 이유일 겁니다. 그때부터 활자라는 것에 제대로 중독됐습니다. 읽던 걸 좋아하던 사람은, 이제 쓰는 걸 멈추지 못하게 되어버렸습니다. 당시를 회상해보면 하루에 두 편의 시를 쓰고, 일주일에 두 편의 수필을 쓰고, 한 달 동안 한 편의 희곡이나 시나리오들을 생산해냈습니다. 소설은 가끔씩 써봤지만, 수업 시간을 제외하고는 부끄러워서 누군가에게 보여주는 것을 피했습니다.
몇 번의 영화 연출부 경험을 하고, 학교를 졸업해 기자가 된 저는 매일 엄청난 활자들을 기계처럼 쏟아냈습니다. 그렇게 2년이라는 시간을 보내면서, 사람이 지쳐갔습니다. ‘원래 내가 쓰고자 했던 글은 이게 아닌데’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헤집어 놨습니다. 그래서 가끔씩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서 에세이를 쓰거나 시를 썼습니다. 그러다 이제는 하루 혹은 이틀에 한 번씩 글을 써야하는 지경이 됐습니다. 완전히 활자 중독자가 되어버렸습니다. 하루 종일 수많은 활자들을 보고, 쓰지만 또 쓰고 있는 삶입니다. 앞서 “왜 글을 쓰냐?”는 질문에 답변하기 위해서 수많은 제 시간들을 나열했습니다. 굳이 줄여서 답변해보자면, 글을 쓰는 시간은 오롯하게 내가 자전하고 있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시간이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내 삶이 어떤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내 삶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가 명확하게 느껴지는 시간입니다.
잠시 동안 글을 멈추고 살아왔던 때가 있었습니다. 일이 너무 많았다는 건 핑계고, 조금 다른 삶을 살아보면 어떨까 싶어서였습니다. 하지만 중독자의 금단 현상은 무서웠습니다. 오히려 빠르게 일상이 무너지는 경험을 했죠. 그래서 무너졌던 일상을 회복하기 위해 다시 쓰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나를 지탱하기 위해서 썼지만, 지금은 누군가를 위로하고 지탱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또 씁니다. 활자 중독자는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그래야만 이 활자가 금단 현상을 채우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의미를 가지지 않을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