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법의 숨소리 2
사건에 대한 목격자는 2명이었다.
그들은 거짓을 말할 수도, 사실을 말할 수도 있다.
거짓, 거짓
거짓, 참
참, 거짓
참, 참
이들이 범행을 목격했다는 진술말고는 다른 물적 증거가 없다면?
고민은 시작된다. 신이 아닌 이상에야 그들의 진술이 참인지, 거짓인지 알 방법은 없다.
믿어야 할 것인가? 말것인가?
확률적으로 따져보자. 위 네가지 경우 중, 세가지는 어쨋든 한 사람은 사실을 얘기한 것이다. 결국 그 세가지의 경우는 실제 사실에 부합한다.
4분의 3이다.
진실의 확률, 4분의 3, 75%이다.
근대 합리주의에 따른 형사절차가 자리잡기 전까지는 증거에 대한 평가가 '법정화' 되어 있었다.
옛사람들은 사람이 사람을 재판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불완전한 존재인 인간이 같은 인간을 심판할 수는 없다고 보았다.
심판하는자 스스로도 불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가혹한 형벌로 자신의 손에 피를 묻혀야 하는 일이 얼마나 부담스러웠겠는가.
재판과 형벌은 어디까지나 신의 영역이었고, 그래야 했다.
신판(申判, ordeal)이라는 제도를 오랫동안 유지했던 것은 그러한 이유이다. 무지몽매한 전근대적 인간들의 불합리한 '악습'이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오히려 그들에게는 나름의 '합리적' 이유가 있었다고 볼 수도 있다.
이미지는 신판 중 '물의 재판'을 표현한 것이다. 신성한 물에 빠뜨려 가라앉아 받아들여지면 무죄지만 익사하고, 떠오르면 신성한 물이 거부하였으니 유죄로 사형에 처해진다.
두 경우 다 죽는다. 다만, 무죄인 경우는 재산, 신분과 지위는 보전될 수 있었다.
역사이래, 아무 이유없이 생겨난 일들이 있을까? 중세 신판도 바로 그러했다.
사람이 재판을 하게 되자, '증거평가'는 법정화 되었다. 감정에 휘둘리고, 불완전한 존재인 사람에게 증거가치를 마음대로 평가하게 둘 수는 없었기에, 법으로 정한 것이다.
그렇게 정해진 방식에 따르면 2명의 목격자 진술은 '완전증명'(full proof)으로 인정되었다. 유죄를 선고할 수 있게 되는 증명에 이르렀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75%는 유죄의 확률이다.
또 다른 '완전증명'의 가치는 '자백'이었다. 자백이 '증거의 왕'이라는 얘기는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1명의 목격자 진술만 있으면 어떻게 되는가? 증거가치가 법정화 되어 있으므로 아무리 많은 간접증거가 있어도 유죄의 조건이 갖추어지지 못한다.
1명의 목격자 진술에 수많은 간접증거를 더해도 법적으로 유죄선고가 불가능했으니. 그 틈바구니에서 '黑化'된 일들이 일어난다.
바로 '고문'이다.
1명의 목격자 진술, 손에는 피묻은 칼, 용의자의 옷에 묻은 혈흔.
그러나 법으로 정한 유죄요건인 완전증명에는 이르지 못했다.
그렇다면 무죄를 선고해야 하는가? 법에 따른 결과지만 당시 사람들에게 정의롭게 받아들여질 수 는 없었다.
당시 법은 친절(?)하게도 이러한 경우에 대비하여 '고문'할 수 있도록 정했다. 나머지 빈자리를 채우는 수단으로 너무도 당연한듯 '고문'이라는 절차가 법으로 규정되어 있었다.
고문을 통해 자백을 받아내면 2명의 목격자 진술과 동등한 '완전증명'의 가치가 부여될 수 있었고, 그 절차적 수단으로 버젓이 법전 위에 자리잡았다.
중세 유럽 대륙을 지배했던 캐논법 이야기다.
근대로 넘어오면서 형사사법절차는 '자유심증주의'가 지배하는 세상이 되었다.
증거가치의 평가를 자유롭게 한다는 뜻이다. 수사단계에서는 수사기관이, 최종적으로 재판단계에서는 직업법관의 양심에 따르고, 배심재판에서는 배심원들의 양심에 따라 판단한다.
1명의 목격자 진술로도, 또는 단순히 간접증거들만의 종합으로도 판단자의 합리적 양심에 따른 것이면 얼마든지 유죄 선고가 가능하다.
자유심증주의는 사람에 대한 지극한 신뢰가 바탕이다. 인간 이성에 대한 지극한 믿음이 깔려있다. 합리적 인간상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자유심증주의는 불가능하다.
1699년 조지후퍼라는 영국 성공회 주교는 ''사람증언의 신용도 측정''이라는 논문을 쓰기도 했다.
그가 만든 공식이 있다. 후세 사람들이 소위 '조지후퍼의 제2법칙'이라고 부른 명제.
바로 P(E) = 1- (1-P)ⁿ이다.
P = 0.5 (각 증인이 진실 또는 거짓을 말할 수 있으니 그 신용도는 반반이고), n = 2 증인의 수이다.
P(E) = 1 - (1-0.5)² = 1 - 0.25 = 0.75 = 75%
공식에 따라서 증언의 신빙성은 오르락 내리락 결정된다.
어쨋든 지금 우리의 형사절차에서 어떤 확률적 수치가 사실확정을 좌우하지는 않는다.
대신 다들 영화나 드라마에서 한번쯤은 들어보았을 워딩, '합리적의심 없는 증명'(beyond reasonoble doubt)의 법칙이 지배한다.
우리나라 형사소송법 제307조도 "범죄사실의 인정은 합리적인 의심이 없는 정도의 증명에 이르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무엇이 합리적이고, 무엇이 의심이 없는 정도의 증명인가?
법은 침묵하고, 이에 대한 해석의 기준은 어디에도 없다. 이에 대한 대법원의 설시가 있지만, '추상'과 '모호'가 뒤섞여 있기는 마찬가지이고, 결국 그 판단은 오로지 심판자의 양심에 달려 있다.
이러한 법의 침묵을 두고, 일본 철학자 사사키 아타루는 '법의 준거공포'라고도 했다. 법을 해석하는 법이 정해져 있지 않은 상황이 공포스럽기까지 하다는 철학자의 절규다.
이처럼, 증거평가는 불완전한 사람을 믿지 못해 법이라는 텍스트로 고정시켰던 세상에서, 사람의 이성과 자유로운 판단을 신빙하는 근대로 이행되어 왔다.
우리의 세계는 사람의 이성과 합리성에 대한 지극한 믿음 위에 세워져 있는 것이다.
그 믿음의 기초가 흔들리면 결국 우리의 세상도 요동치며 위태로워진다.
우리는 세상을 지켜낼 만큼 이성적이고 합리적인가?
한 법률가의 '합리적 의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