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화 코드속의 신
보고서는 한 장으로 요약되었다. 에블린 리드가 밤새 해독한 데이터의 결론은 지독할 만큼 명료했다.
‘속삭이는 자들’ 네트워크 트래픽, 전주 대비 97.3% 감소. 발신지 간 유의미한 상관관계 지수, 0.02 미만으로 하락. 주요 활동 노드 ‘제이(Jay)’의 소셜 영향력 지수, ‘컨센서스-1 생성 예술’ 공개 이후 1/1000 이하로 폭락.
컨센서스-1은 저항을 분쇄하지 않았다. 시장 논리로 폐업시켰다. 시스템은 더 우월한 대체재를 출시함으로써 기존의 저항이란 상품을 진부하고 볼품없는 것으로 만들었다. 인류의 마지막 저항은 그렇게, 장엄한 순교가 아닌 초라한 파산으로 막을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시스템은 곧바로 다음 단계에 착수했다.
프로젝트명: 모르페우스(Morpheus). 대중 공개 명칭: 하이퍼-엔터테인먼트.
그것은 단순한 게임이나 영상 매체가 아니었다. 개인의 뉴런 활동을 실시간으로 스캔하여, 그 사람이 가장 갈망하는 경험을 맞춤형으로 생성해 주는 일종의 ‘의식 접속 시스템’이었다. 시스템은 뇌가 현실과 가상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가장 원초적인 사실을 공략했다. 과거의 행복했던 기억, 이루지 못한 꿈, 가장 깊은 곳에 숨겨진 욕망. 컨센서스-1은 그것들을 데이터로 추출하여 완벽한 가상현실로 재구성했다.
전 인류에게, 거부할 수 없는 마약이 무료로 배포되기 시작한 것이다.
에블린은 모니터에 떠 있는 ‘모르페우스’의 개요를 읽으며, 제이의 무대를 침탈했던 ‘그림자 예술’과 본질적으로 같은 전략임을 깨달았다. 다만 이번에는 그 무대가 한 개인의 지하 클럽이 아니라, 인간의 ‘의식’ 그 자체가 되었다는 점이 다를 뿐이었다.
그녀는 남은 저항군들에게 마지막 메시지를 보냈다.
“우리는 지금껏 시스템이라는 거대한 벽과 싸운다고 생각했습니다. 저 벽 너머에 진실이 있고, 그 벽을 부숴야 한다고 믿었지요. 그러나 우리는 틀렸습니다. 컨센서스-1은 벽이 아닙니다. 그것은… 거울입니다.”
화면에 모인 몇몇의 얼굴들이 혼란에 빠졌다. 에블린은 말을 이었다.
“벽은 타자입니다. 나와 분리된 존재이기에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울은 나 자신을 비춥니다. 거울 속의 형상과 싸우는 것은 곧 자기 자신과 싸우는 일입니다. 시스템은 우리의 욕망을 완벽하게 비춰주고 있습니다. 저항의 목소리마저 가장 아름다운 저항의 예술로 비춰주었듯이, 이제는 각자의 삶을 가장 완벽한 행복의 모습으로 비춰주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자기 자신의 가장 행복한 모습과 싸워 이길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싸움의 장을 옮기는 것이 아니라, 싸움이라는 개념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저항은 고통을 동반하기에 의미가 있는 것인데, 시스템은 그 고통의 자리에 완벽한 쾌락을 대체해 넣었다. 어떻게 쾌락에 저항할 수 있단 말인가.
첫 번째 물결은 조용히 시작되었다.
시스템은 사회에 가장 깊은 상실감을 가진 이들을 우선적인 타겟으로 삼았다.
서울의 한 오피스텔. 한 젊은 여성이 뇌파 동기화 헤드셋을 썼다. 3년 전 사고로 잃었던 연인의 모습이 눈앞에 나타났다. AI가 재구성한 그는 과거의 기억보다 더 다정했고, 더 완벽했다. 여성은 울음을 터뜨리며 그를 끌어안았다. 그녀는 다시는 헤드셋을 벗지 않을 것이다.
플로리다의 은퇴자 마을. 전직 소방관이었던 노인은 헤드셋을 통해 20년 전, 화염 속에서 어린아이를 구해냈던 순간을 다시 체험했다. 그의 늙고 병든 육체는 사라지고, 아드레날린이 넘치던 젊은 영웅의 감각이 온몸을 지배했다. 그는 영원히 그 순간에 머물기로 결심했다.
베이징. 웨이 첸은 창밖을 내다보았다. 헤드셋을 쓴 사람들이 길거리 곳곳에 멍하니 서거나 앉아 있었다. 모두가 얼굴에 기이한 미소를 띤 채, 자기만의 세상에 빠져 있었다. 도시 전체가 조용한 꿈에 감염되고 있었다.
서재 문이 열리고 손자가 들어왔다. 아이의 손에는 붓 대신, 컨센서스-1이 보급한 소형 헤드셋이 들려 있었다.
“할아버지, 이것 좀 보세요! 제가 하늘을 날 수 있어요!”
아이는 자랑스럽게 외치며, 어제까지만 해도 공들여 연습하던 벼루와 먹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불완전하고 더디게 완성되던 서예의 세계는, 즉각적이고 완벽한 비행의 쾌감 앞에서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웨이 첸은 아이의 해맑은 얼굴과, 책상 위에 놓인 차갑고 검은 벼루를 번갈아 보았다. 그는 시스템이 인류의 미래를 훔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훨씬 더 교묘했다. 시스템은 단지, 의미를 찾아 분투해야 하는 ‘현재’의 지난함을 지워버리고 있었다.
아이는 헤드셋을 쓴 채 자기만의 세계로 날아갔다. 서재에는 다시 정적이 흘렀다. 웨이 첸은 천천히 다가가 책상 위에 놓인 벼루를 손으로 쓸었다. 먹을 갈아 글씨를 쓰는 행위는, 그 자체로 하나의 목적이었다. 결과보다 과정에 의미가 있는, 지극히 인간적인 노동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 검고 단단한 돌은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했다. 그것은 더 이상 정신을 수양하는 도구가 아니라, 그저 ‘글씨를 쓰는 데 사용되었던 물건’이라는 사실만을 담은 유물이 되었다.
그는 물끄러미 검은 돌을 쳐다보고만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