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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나니의 진심

세상이 몰라주었을

by 나야

그 마을에선 70대 초반도 팔팔한 청년으로 통했다. 주민 대부분이 구부정한 노인들이었고 마당에 풀이 우거진 빈집도 쉽게 눈에 띄었다. 지나가다 혹시 저 집도 빈집인가 싶어 쳐다보고 있을라치면 사람이 불쑥 방문을 열고 나오기도 했다.


집에서 차로 약 50분 거리. 친정 엄마는 텃밭 농사를 위해 도시에서 사나흘에 한 번씩 그 동네로 출퇴근한다. 어느 날 '망나니 이야기'를 듣게 된 것도 그녀를 통해서였다.


소문의 주인공은 20대 중반의 진짜 청년. 이 마을 문법에 따르자면 아직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신생아인 셈이다. 한창 피어나는 새싹이 어쩌다 싹수없는 '망나니' 소리를 듣게 됐을까? 앞에 '개'자가 붙기도 한다는 말에 나는 귀를 의심했다. 대체 왜?


설명은 단 한 줄로 충분했다. 몇 해전 집안 제삿날 그가 상을 뒤엎었다고 했다. 새파랗게 어린 조카의 망나니 같은 행동에 어르신들은 퍼렇게 질린 표정으로 현장을 벗어났다고. 이후 그 집안에서 누구도 그를 건드리는 사람이 없었으며, 그가 지나가면 이웃 주민들은 나지막이 흉을 보았다. 무자식이 상팔자라고 혀를 차면서.




폭염이 아스팔트를 녹이던 지난여름, 낯선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받을까 말까 망설이다 초록색 버튼을 눌렀다. 엄마의 다급한 목소리가 귀를 때렸다.


나야니? 큰일 났다. 차문이 잠겼는데, 열쇠랑 휴대폰이 전부 차 안에 있어!


(허걱) 이 전화는 누구 거예요?


앞집에서 빌렸다. 마침 성민이(가명)가 있더라고. 만나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성민이'는 동네 사람들이 망나니라 손가락질하던, 바로 그 청년이었다. 엄마가 간절하게 이웃을 찾아 나섰지만 집집마다 사람이 없었고, 앞집에 가니 그 청년이 꾸벅 인사를 하더란다.


덕분에 겨우 전화기를 빌려 통화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달라질 게 없었다. 당시 나도 근무 중이어서 몸을 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막막한 심정을 쏟아내듯 말이 빨라진 그녀를 어떻게든 안심시키고 싶었지만 머릿속이 깜깜했다. 무조건 보험회사를 외치는 수밖에.


보험회사? 어떻게 부르는 거냐? 기다려봐라, 이 총각한테 물어볼게.


전화를 끊고 다시 초조한 시간이 흘렀다. 허둥지둥하고 있을 엄마가 눈에 선한데도 뾰족한 수가 없다니. 낭패감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보험회사에 제대로 접수했는지 '성민 씨'에게 전화로 물어볼까 싶었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마당에 엉망으로 나뒹구는 제사상이 드라마처럼 느린 화면으로 재생되었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더운 날씨에, 괴팍한 성질이라도 돋우게 되면 엄마가 더 난감해지는 건 아닐까? 오만가지 걱정이 제사상 옆을 같이 굴러다녔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전화기만 노려보고 있었다. 30여분쯤 지났을까. 시계초침 소리에 쫓기고 있을 때 드디어 발신자 표시창에 <엄마>가 떴다.


보험회사 출동해서 방금 차문 열었다!


후우. 긴 호흡으로 불안을 뱉어냈다. 그제야 안도감이 밀려왔다. 그나저나 엄마는 어떻게 해결하신 걸까? 보험회사 ARS 접수는 나도 더듬거리기 일쑤인데.


성민이가 전화해서 다 처리해 줬다. 기다리는 동안 나 더울까 봐 에어컨 틀어주고, 얼음물도 갖다주고 사람이 어찌나 싹싹하던지~


한결 편안해진 엄마의 목소리를 들으니 나도 살 것 같았다. 안하무인이라던 소문 속의 그 청년이 없었다면, 늙으신 엄마가 찌는 더위에 야외에서 어떤 고초를 겪었을지, 상상만 해도 진땀이 났다. 뜻밖에 큰 신세를 지고 보니 망나니라고 뒷말했던 것도 미안하기만 했다. 뭐라도 보답하고 싶은 마음에 감사 인사와 함께 당장 모바일 상품권을 보냈다. 곧 메시지가 날아왔다.


별 일도 아닌데 쑥스럽네요. 감사합니다.


그의 답장을 받고 잠시 멍한 기분이 들었다. 그간 마을에 떠돌던 칙칙한 소문은 어쩌면 그의 본모습을 제대로 모르고 하는 말들이 아닐까.





사실 그가 제사상을 뒤엎은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청년의 아버지는 6남매 중 막내였고, 어머니는 소아마비로 다리가 불편한 장애를 지니고 있었다.


아버지 쪽 형제들은 그 시절 어려운 농촌 살림에도 도시로 나가 학업을 이어갔다. 대학을 졸업하고 다들 번듯하고 안정된 직업을 갖추고 있었다. 한데 막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부친이 돌아가시며 가세가 급격히 기울었다. 결국 청년의 아버지는 중학교 책가방 대신 괭이나 삽을 들고 논밭을 일궈야 했다. 평생 농사를 지으며 고향을 지킨 삶이었다.


그리고 지금껏 막중한 책임과 오랜 시간, 많은 노력을 요하는 집안일들을 고스란히 떠맡아 왔다. 대표적인 것이 제사와 김장. 수십 년 동안 형제들을 대신해 제사상을 차렸고, 해마다 겨울이면 배추를 산처럼 쌓아놓고 김장을 담갔다. 이들이 한파에 시린 손을 녹여가며 담근 김치는 도시의 형제들 냉장고에 차곡차곡 쌓였다. 그러고도 싫은 소리 한번 없이 소처럼 우직하게 주어진 역할에만 충실하며 살아온 부부였다.


그 모습을 보다 못한 아들이 작정이나 한 듯 제삿날 상을 뒤엎었다. 이후 그 집안의 제사가 어떻게 되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다만 청년이 어르신들 앞에서 막무가내로 행동했던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다. 그건 아마도 평생 무시당하며 살아온 아비와 어미를 지키기 위한 몸부림이 아니었을까.


결코 바람직한 방법은 아니었지만 벼랑 끝에서 소중한 무언가를 잃지 않으려면 선택의 여지가 많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남들이 뭐라 하든, 이제 우리는 그 청년을 더 이상 망나니라고 하지 않는다. 세상이 몰라본 그의 진심이 있을 거라 믿어주고 싶다. 누구나 말 못 할 사정 하나쯤 품고 사는 게 인생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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