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환 <바위>를 읽고 나서
흰머리가 늘면서 생각을 붙잡는 습관이 생겼다.
생각이 더 깊어질까 하여 머리도 기르기 시작했다.
깊어진 생각은 글로 옮겨야만 비로소 붙잡힌다.
그래서 글 쓰는 것으로 이끌렸나 보다.
수십 년을 흥얼거렸던 노랫말도 붙잡아 보고,
콧등을 스치는 바람도, 거기에 실려온 냄새도 붙잡고,
반짝이는 물결도, 한 밤중의 고요함도 붙잡아 글로 옮겨본다.
그러면 내가 보이려나, 내 인생이 보이려나.
인생이 깊어지면 눈이 깊어진다고 하던데,
나는 머리만 자꾸 하얘진다.
언제부터인지 시(詩)가 참 좋아졌다.
짧은 듯 긴, 뭉쳐진 듯 펼쳐진,
한 줄 한 줄에 담긴 의미를 읽어내고,
줄과 줄 사이에 숨을 고르고 감정을 느낀다.
때로는 한 단어에 우주를 담고,
때로는 한 줄에 인생을 담는다.
읽을 때면 내 이야기 같고,
책을 덮고 나면 어느새 내 안에 들어와 있다.
그렇게 시는 나도 모르게 내가 된다.
삶이 복잡해지는 30대에 '바위'라는 시를 만났다.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이 첫 문장이 어느덧 내 안에 들어와 있었다.
말이 없이 아주 오래 세상을 지켜보고 싶었을까?
선녀 같은 그녀를 정말 우연히 만났다.
혼인을 하고 아이 셋을 낳고도 그녀는 하늘로 올라가지 않았다.
수많은 날개 옷들이 옷장 안에 버젓이 걸려 있지만,
그녀는 절대 날지 않았다. 최소한 내 앞에서는 그러했다.
오히려 나에게 묻는다.
‘도 닦는다고 제발 산에는 들어가지 마세요.’
‘ 살아가는 게 도 닦는 것인데 굳이…’
나와 같은 이유로 그녀도 날개 옷을 꺼내지 않는 것이리라.
내가 신선(神仙)이 되지 않을 거라면, 그녀도 굳이 선녀로 돌아갈 이유가 없지 않은가.
‘혹시 다시 태어나면 나랑 같이 살 거예요?’
'바위로 태어나고 싶어…'
그녀는 삐죽이 입술을 내밀고,
‘다음 생에는 여자로 태어나서 나랑 역할을 바꿔요’
'생각해 보고…'.
우리들의 대화는 첫째 아이가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내 안에 먼저 들어와서 나의 일부가 되어버린 바위를 말하였고,
그녀와의 인연(因緣)을 더 오래 유지하고 싶어 '생각해 보고'라고 했었다.
얼마 전, 나는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하고 말았다.
제발 여자로 다시 태어나 달라는 그녀의 애원에
나는 엉겁결에 '사람으로는 태어나볼게' 했다.
아뿔싸, 이번 여행에서도 윤회(輪廻)를 졸업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녀의 입꼬리는 광대뼈까지 올라갔고,
나의 마음은 한 없이 무거워졌다.
어쩔 수 없다.
내가 한 말은 이미 온 우주가 들었을 테니.
한 번의 삶은 더 살고 이곳을 떠나야겠다.
유치환 <바위> 1941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애련(愛憐)에 물들지 않고
희로(喜怒)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
억 년(億年) 비정(非情)의 함묵(緘默)에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여
드디어 생명도 망각하고
흐르는 구름
머언 원뢰(遠雷)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 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