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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니 Oct 29. 2022

프롤로그. 매일 메일 아날로그 여행

혼자 떠나는 여행, 매일 나누는 경험 

  4년 전 첫 유럽 여행, 런던의 한 서점에서 빨간 수첩을 샀습니다. 붉은 가방에 여러 나라의 스티커가 붙어 있는 모양이었죠. 볼펜 한 자루와 그 수첩을 늘 쥐고 다니며 새로 만나는 세상에서 느낀 것들을 적었어요. 20대 초반의 순박하고 말간 마음이 가득 담겼습니다. 한국에 돌아와 취업을 하고 직장인으로 적응을 하는 동안에 그 수첩은 잊혀졌고, 잃어버린 줄 알았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책장 서랍에서 노랗게 빛이 바랜 수첩을 찾았습니다. 코로나로 해외라던지, 여행이라는 게 딴 세상 이야기처럼 느껴질 때요. 앉은자리에서 수십 장의 메모를 쭉 읽었습니다. 엉성한 그림도 가득이더군요. 유럽에서 오줌 참기가 늘었다는 문장에 웃고 나만 이렇게 멋진 풍경을 봐서 미안하다는 문장에 울면서 찬찬히 읽었습니다. 

 

  분명 사진도 잔뜩 동영상도 가득 찍어 편집까지 해서 남겼는데도 글로 남긴 기록은 뭔가 다른 느낌이었어요. 기억에서 사라져 버린 순간의 감정이 생생하게 남아 있었습니다. 이게 내가 쓴 게 맞나, 의아할 만큼 아득하고 따뜻했어요. 꽤 두꺼운 수첩이었는데 남아 있는 반절의 깨끗한 종이를 보면서 다시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수첩을 들고 가서 다시 한번만 세상을 모험해보고 싶다고. 그러면 자신감을 잃은 사회 초년생에서 다시 호기심 가득 열정 가득 젊은이가 될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조금씩 하늘 길이 열리던 때에 과감히 비행기 표를 질렀습니다. 마땅히 함께 갈 사람이 없어 혼자 떠날 요량으로요. 처음으로 혼자 하는 여행이었어요. 아니 2주를 아무도 만나지 않고 보내 본 적도 없는 것 같네요. 왜인지 특별하게 느껴지는 이 여행을 특별하게 남기고 싶었고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떠나기 전에 미리 여행기를 듣고 싶은 사람을 모집해서 매일 그날의 여행을 메일로 보내주는 '이메일 레터 프로젝트'를 기획했습니다. 경험을 나누는 가장 쉬운 방법은 SNS로 실시간 사진과 글을 남기는 것이겠지만 제 여행이 의도와 다르게 자랑이 되어버리는 게 싫어서, 누군가에 가 불행이 되는 게 싫어서 고안한 방법이었어요. '듣고 싶은 사람에게만 온 마음을 다해 경험을 나누자'는 생각이었죠. 


 저는 유명한 인플루언서도 아니고 그저 평범한 사람이지만 글쓰기를 좋아하고 다른 이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면 용기가 생기는 편입니다. 유명한 작가들이 한다는 이메일 레터 나도 할 수 있지 뭐 생각하며 무료 모집 글을 올렸고 70명 정도의 사람들이 신청을 해주었습니다.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 골고루였어요. 그들이 남겨준 응원의 말에 무슨 국가 대표라도 된 것 같은 마음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떠난 여름의 유럽에서, 조금은 까지고 바래진 빨간 수첩에 담은 순간의 생각과 마음을 매일 밤 긴 글로 풀었어요. 열네 편의 메일 레터와 그에 대한 독자들의 답장을 엮었습니다. 현지에서 보내는 편지 그 느낌 그대로 읽어주시면 행복할 것 같습니다.


[여행 레터 신청에 남은 응원 메시지] 


- 청춘이라는 단어는 매우 매력적이죠. 10대의 청춘, 20대의 청춘, 30대의 청춘. 각 나이대별로 다른 청춘이 있는 것 같아요. 저는 20대 구독자입니다. 나니 님의 청춘 한 조각을 맛볼 수 있다면 영광일 것 같습니다.

- 이런 발상을 하다니 메일로 나현이의 유럽시간을 기다릴게요.

- 같이 여행 떠나는 느낌이에요! 제가 다 설레고 기대됩니당ㅎㅎ 즐겁고 안전하게 다녀오시구 재미난 이야기 가득 들려주세요

- 참 아름다운 일을 하시네요!

- 유튜브에 올리셨던 유럽 여행 영상을 보면서 저도 유럽여행 계획을 짰었는데 코로나 때문에 여행을 취소를 해서 너무 아쉬웠어요. 매일 유럽에서 보내는 메일을 받아볼 수 있다는게 너무 낭만적이고 하루하루 어떤 메일이 올지 벌써 설레고 기대되네요 ㅎㅎ 요즘 너무 스트레스받고 지치는 일상이 반복돼서 힘든데 이런 특별한 여행 레터를 받을 수 있어서 좋아요 감사합니다.

- 멋진 아이디어로, 멋진 영향력을 주는 나니씌 당신의 수첩을 공유해 주셔서 감삼다. 유쾌하고 평안한 여행이 되길! 그리고 이 여행이 일상을 또 다른 여행으로 만들어주길! 당신이 생각하는 만큼 저도 당신이 평안하고 행복을 바랍니다. 




출발합니다

2022년 7월 15일


   안녕하세요, 나니입니다. 멀게만 느껴지던 날이 당장 오늘이 되었다니 기분이 이상합니다. 아무리 좋은 날도 싫은 날도 어찌 되었든 불쑥 다가오고 훌쩍 지나가는 게 세상의 이치인가 싶습니다. 저는 오늘도 바쁘게 근무를 하고 있습니다. 몇 시간 뒤 공항으로 가야 하는데요. 꼭 이런 날엔 업무가 쏟아져서 더 정신이 없네요. 이렇게 우다다 일을 하다가 비행기를 타러 간다는 게 생뚱맞게 느껴집니다. 원래 같았으면 조금 스트레스였을텐데 여러분에게 들려드릴 이야깃감이 생긴 것 같아 재밌네요.  


  이메일 레터, 아름다운 유럽을 다시 가서 혼자만 보기는 아깝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글을 읽어줄 사람을 모집했는데 제 생각보다 훨씬 많은 분들이 신청을 해주셨어요. 얼떨떨합니다. 항상 제가 뭔가를 나눠줘야지 하고 손을 내밀면 저는 더 큰 걸 받곤 합니다. 이번에도 그래요. 부끄러워서 주저하다 올린 신청 양식에 응원과 기도가 그렇게 많을 줄 몰랐습니다. 그냥 여름휴가로 좀 멀리 떠나는 것뿐인데 수많은 사람들이 잘 다녀오라고 하니 제가 꼭 올림픽 출전하러 가는 국가대표가 된 기분이었어요. 남겨주신 응원의 말씀들 마음에 잘 담아서 출발하겠습니다. 정말 감사해요. 쑥스럽고 부담이 되기도 하지만 대단한 글을 쓰겠다기보다는 제가 느끼고 겪은 것들을 소박하게 나눠보겠다는 마음으로 편지를 쓰겠습니다.    


짐을 다 싸고 마지막 준비로 탑건 매버릭 플레이리스트를 다운받았습니다. 이륙할 때 들으면 왜인지 더 멋진 경험이 될 것 같아서요. 너무 웅장해지려나요. 안전한 비행이 되길, 경유지에서 제 수화물이 좀 빨리 나오길 기도해주세요. 


이 편지를 받는 분들 모두 즐거운 저녁 보내시길 바라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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