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7월 16일 (토)
저는 지금 독일의 수도 베를린입니다. 불후의 명곡 신동엽 아저씨처럼 짜잔 하고 말해주고 싶어서 일부러 제가 어디를 가는지는 미리 밝히지 않았어요. 앞으로 어딜 가는지도 안 알려드립니다. 여긴 일교차가 크기는 해도 15~19도 정도로 시원한 날씨입니다. 한여름 옷만 잔뜩 챙겨와서 노란 바람막이만 2주 내내 입고 다녀야 할 것 같아요. 꼼꼼히 챙긴다고 챙겼는데 생각보다 더 쌀쌀하네요.
독일은 다들 아시다시피 저에겐 아주 의미 있는 나라예요. 겨우 6개월 살아 놓고 뭐가 그리 유난인가 싶을 만큼요. 베를린 공항에 딱 도착해서 길을 한참 헤매다가 여러 사람들의 도움으로 겨우 빨간 기차를 타서 창밖을 보는데 뭔가 익숙하고 편안한 기분이 드는 거예요. 오래전 경험 같지 않고 마치 그 풍경 속에 제가 매일 있었던 것 같았죠. '이상한 기분이다' 생각하는데 창 밖에 보이는 주택 마을 풍경을 보면서 알았습니다. 제가 정말 자주 예전에 살던 독일 마을을 잊어버릴까 봐 눈을 감고 더듬 더듬 그리면서 걸어 다녀봤단 걸요. 다시 가도 길을 잃지 않고 씩씩하게 돌아다니고 싶어서 눈을 감고 이다음엔 뭐가 있었지, 학교 가는 길은 이쪽이지, 이 슈퍼 다음엔 그 아이스크림 가게가 있지 하면서요. 그것과 닮아있는 풍경이 낯설 리가 없잖아요. 그렇게 제 속에 늘 고여있던 그리움 때문에 이번 여행의 첫 번째 목적지를 베를린으로 정했습니다. 그리움은 오래 고이고 모이다 보면 요상한 서글픔이 되거든요. 코로나 때문에 더더욱 환상적이고 아득해져 버려서 이번 기회에 그런 걸 좀 깨고 현실로 만들고 싶었어요. 여긴 언제든 내가 원하면 다시 올 수 있다고 한번 확인해야 좋은 추억이 더는 슬퍼지지 않겠더라구요. 그리고 사실 저 베를린은 안 와봤거든요. 프랑크프루트, 뮌헨, 함부르크, 브레멘, 올덴부르크, 본, 뉘른베르크, 뒤셀도르프, 쾰른, 하노버까지 독일 내 도시를 열 군데를 더 다녀놓고 베를린만 안 가봤어요. 독일에서 교환학생 했다고 하면 맨날 당연히 베를린 이야기를 해서 난감했기도 하고 예술의 도시이자 역사적 도시로 볼거리도 많다는 게 매력적이었습니다.
혼자 비행기를 타고 카타르 도하라는 자주 들어보지도 못한 중동 국가 공항에서 경유를 하면서도 두려운 마음이 들지 않았어요. 졸리고 배고프다고 중얼대긴 했어도 외롭거나 무섭지 않은 걸 보고, 제가 독립적인 어른으로 잘 자라고 있나 보다 생각했죠. 다들 혼자 비행기를 타고 나가본 적이 있으신가요? 저만 겁보는 아니겠죠. 저의 첫 해외여행은 대학에서 가는 단기 해외 문화 체험 프로그램이었는데요. 첫 출국을 혼자 하느라 탑승 수속할 때 바구니에 짐 놓는 것도 몰라서 한 부부가 도와주셨고, 비행기가 이륙할 때는 눈물이 찔끔 났던 기억이 납니다. 그에 비하면 지금은 많이 큰 거예요. 어제 조카가 와서 선물이라고 종이를 하나 줬는데요. 파랗고 검은 게 고래인가 했는데 경찰 차래요. 저를 지켜줄 거라고 하더라고요. 이런 부적을 가지고 와서 당황스러운 일 하나 없이 용감한 마음으로 무사히 잘 왔나 봅니다. 거기에 어제 제가 부탁한 대로 다들 기도해주신 건지 수화물도 되게 빨리 나왔고요, 빽빽한 이코노미석에 제 옆자리만 계속 비어있던 거 있죠. 다들 감사합니다. 덕분에 편하게 왔어요.
빨간 수첩의 마지막 기록, 2018년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에서 적은 메모. '독일에 언제 다시 올까, 어떤 마음으로 올까'라는 물음. 저는 이번에 제가 아직도 자유롭고 꿈꿀 수 있는 사람이란 걸 확인하고 싶은 마음으로 왔고, 유럽에서의 생활이 그리워서 왔고, 일이 조금 지쳐버려서 쉬고 싶고 멋진 풍경을 보고 싶어서 왔습니다. 어릴 때 생각한 거 보단 별거 없고 건조해요. 아, 메일 레터를 쓰는 건 좀 예상 밖의 새로운 일인데요. 4년 만에 다시 독일로 가는 비행기에서 읽은 책 작가의 말에서 지금 제 마음을 표현할 말을 딱 찾았습니다.
'어쩌면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은 그들을 대신해 마음의 풍경을 그리는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오늘 밤이 지나면 사라져 버릴지라도 지금은 분명히 존재하는 어떤 기미와 흔적을 언어로 붙잡아두는 일. 굳은살처럼 딱딱해진 마음의 외피 아래서 벌어지는 사소하지만 결정적인 순간들을 기록하는 일'
<오늘 밤은 사라지지 말아요> 백수린
>> 어떤 책을 들고 왔는지도 다음 레터에서 소개해볼게요!
오늘 저는 하루를 30시간쯤 살았나 봅니다. 16일 새벽에 출발해서 경유 시간 포함 16시간을 비행기를 탔는데 시간을 거슬러와서 도착하니 낮 12시 반이더라고요. 하고 싶은 게 많아서 늘 하루가 30시간이었으면 좋겠다고 노래를 불렀는데, 막상 오늘 살아보니 좀 많이 피곤해요. 전 여행할 때만큼은 P 유형이 되는지라, 별다른 계획도 못 세우고 와서 일단 주린 배를 채우러 밖에 나갔어요. 숙소가 핫플레이스 쪽에 있어서 그냥 산책만 해도 재밌겠더라구요. 혼자 여행하는 건 자유롭고 조용합니다. 내가 어떤 걸 느끼는지 한참 곱씹을 수 있고 깊은 사유에 빠질 수도 멍을 실컷 때릴 수도 있습니다. 걱정한 것보다 재밌더라구요. 제가 평소에도 혼자 노는 걸 좋아해서 잘 맞는 걸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 복병이 있었습니다. 밥을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와글와글 노상 펍에는 갈 힘이 없고, 독일 음식은 맛이 없고(?), 예전 유럽여행에서 밥 안 줘서 화난 적이 많아가지고 겁이 나더라고요. 주변 지인들이 알려준 식당은 멀리 있거나 문을 닫아서 한참을 걸어 다니면서 적당한 곳을 찾는데.. 아니 밥 먹는 게 이렇게 용기가 필요한 일이냐구요. 괜히 다 잘하고 식당 고르면서 혼자 쫄아서 골목골목 속의 피자 집에서 마르게리따 피자로 첫끼를 먹었습니다. 내일은 밥을 더 씩씩하게 먹어볼게요. 이럴 땐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무모할 정도로 용기가 나던 친구가 떠오르네요. 함께해서 즐겁고 힘이 되었던 친구들을 며칠씩 순간 이동시켜서 데리고 오고 싶어요. 이제는 다들 직장인이 되어 함께 여행하는 게 쉽지가 않습니다. 돈, 시간, 체력이 여럿이 같이 맞기가 하늘의 별 따기예요. 가볍게 미국이나 유럽 여행을 말할 때면 대충 상상해보는 건데도 퇴사를 전제해가며 말해야 하거든요. 혼자 여행은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이젠 해야만 하는 게 된 것 같기도 합니다. 하고 싶은 말이 더 많은데 다 하다가는 잠을 못 자겠어요. 아쉽지만 또 들려드릴 기회가 있으니 이만 줄이겠습니다. 한국은 이제 아침이겠군요. 저는 어서 잠을 자야겠습니다. 오늘도 즐거운 하루 되세요!
[오늘의 질문]
- 코로나 이후로 해외를 안 갔다면 어딜 제일 먼저 가고 싶으세요?
- 혼자 여행해본 적이 있나요?
- 꼭 해외나 여행지가 아니어도 그리운 동네가 있나요?
- 여행할 때 P 유형인가요 J유형인가요?
- 당신에게 여행에 가장 중요한 건 뭔가요? 맛집, 랜드마크, 살아보기?
RE: [나니의 빨간수첩] 1. 혼자 베를린에서
2022년 7월 18일 00:14
- from A
이렇게 이메일을 보내는 게 맞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펜팔이 된 것 같아 너무 즐거워!! 피곤할 텐데 밥 잘 먹고 잠 잘잤쥐? 멀리 있으니까 더 MISS YOU,,,
나니 레터 읽으면서 나의 여행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어서 참 좋았어! 요즘 여행이나 어디 가고 싶다는 생각이 잘 안 들었는데 곰곰이 다녀온 여행들 생각해보니까 죅금 눈물 한 방울 막이래... ㅎ
베를린 너무너무 부러워!! 나 꼭 나니가 다녀 온 루트대로 독일 댕겨볼거얏 왜냐면 당신의 픽은 완전 나의 취향이고 함께 여행하는 느낌 내볼랑께~! ㅎ 난 이제 자러 갈게! 나니 오늘도 활기차고 좋은하좋은 하루기야 아좌좌아좌좌좌좌
- 코로나 이후로 해외를 안 갔다면 어딜 제일 먼저 가고 싶으세요?
뉴질랜드에 너무 가고 싶어요.
광활한 자연에 파묻히고 싶고 초록색 산과 들판을 보며 여유롭게 즐기고 싶어요!!
- 혼자 여행해본 적이 있나요?
여러 번 해봤어요! 혼자 여행은 오롯이 자신을 알아 갈 수 있는 시간이라 참 좋아요. 최근엔 20대 초반의 혼자 여행에서 좋았던 것과 20대 후반의 혼자 여행에서 좋았던 것들을 비교할 수 있었어요. 생각이 어떻게 변했는지 어떤 걸 더 선호하게 됐는지 취향을 확실하게 알 수 있게 됐어요!
- 꼭 해외나 여행지가 아니어도 그리운 동네가 있나요?
최근에 태국 빠이의 한 동네가 유독 그리워요. 땡볕이었지만 돌아다니면서 너무너무 행복했었거든요. 가끔 그곳 생각하면 왈칵! 눈물이 그렁그렁해질 때도 있어요. 왜인지 모르겠지만 참 아련해요.
- 여행할 때 P 유형인가요 J유형인가요?
여행할 때 이동 시간과 장소를 오프라인 구글 지도에 저장해둘 만큼 빡빡한 J였는데 최근엔 P로 변해서 역이나 숙소 정도만 생각해서요. 다른 건 가서 찾으면 되겠지 하구요! 이렇게 해서 좋아진 점은 계획대로 안 될 때 화나던 것들이 사라지게 돼서 너무 행복해요.
- 당신에게 여행에 가장 중요한 건 뭔가요? 맛집, 랜드마크, 살아보기?
살아보기가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맛집도 좋고 랜드마크도 좋은 데서 살아보면서 이런 곳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로컬 시장에 다녀오거나 단골 손님이 되어 주민들처럼 지내보는 경험이 저에겐 참 소중했던 것 같아요.
RE: [나니의 빨간수첩] 1. 혼자 베를린에서
2022년 7월 18일 04:14
- from H
오 자다 깨서 어쩌다 메일 확인하니.. 프로젝트를 시작하셨군요! 엽서 느낌의 레터를 메일로 받는 것도 새롭고 느낌있네요 오늘의 질문 코너도 재밌구요!
혼자 다녀온 여행지는 유럽 태국-캄보디아 일본 정도인 것 같은데요. 일본 태국에선 간단히 혼자 식사하기 좋았는데 유럽에선 매번 혼자 밥 먹기 지치더라구요. 그래서 저는 과일이나 샌드위치로 자주 때웠습니다ㅋㅋㅋ 과일을 워낙 좋아하긴 하는데 유럽 과일이 싸고 맛있더라구요.
그러다 한국말과 밥이 그리우면 한인숙소에 하루정도 지내면서 에너지 충전하고 그랬던 기억이 나네요. 사진 속 날씨가 청명해 보여서 사진만 봐도 기분이 상쾌해지네요. 코로나 이후에 여행을 못 갔는데 저는 만약 한곳만 간다면 포르투갈을 고르겠습니다. 음식도 와인도 맛있고 포르토까지 쭉 이어지는 해변이 너무 멋있어요. 리스본에서 가까운 '에이세이라'라는 동네가 생각나는데 거기서 2주 정도 서핑 캠프에 있었거든요. 아침에 일어나서 서핑하고 밥 먹고 책 보고 음악 듣다 낮잠 자고 보드게임하다가 다시 서핑하고 밥 먹고 파티하고... 지상 낙원에 가장 가까운 곳이었습니다ㅋㅋㅋㅋ 여행할 때 랜드마크나 맛집 한두 군데만 정해놓고 그때그때 맞춰서 행동하는 편이라 P에 더 가까운 것 같아요. 보통 도시 한군데 머무르면 최소 일주일 이상은 있으려고 하고 특별히 어딘가 보러 가지 않아도 동네 주민처럼 조깅하고 카페 가고 사람 구경 하는 것도 좋더라구요. 성당 같은 랜드마크도 보다보면 느낌이 전혀 없더라구요.. 다음에 여행 가면 저도 나현님 처럼 프로젝트 하나를 진행하면서 가봐야겠어요. 음식이나 술 기행이라던가 미술이나 음악을 테마로 잡아서 이렇게 이야기로 남기면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아요.
조카가 준 경찰차 부적 정말 귀엽네요ㅋㅋㅋㅋ 오늘은 용기를 가지고 기가 막히는 레스토랑 예약해서 혼자 만찬을 즐겨보세요! 저도 혼자 스테이크 썰어본 적은 없는데.. 인증하시면 형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좀 비몽사몽이라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나현님의 안전하고 즐거운 여행을 염원하며 다시 자러 가보겠습니다. 레터 정말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