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도 마실 나왔니? 나도 이 다리로 마실 나왔다
이게 가을이란 말이지... 몸을 스치는 상큼한 바람, 따사로운 햇살... 최곤데!
이 좋은 느낌을 사람들은 원하기만 하면 아무 때나 누리고 산 단 말이지... 와~! 개부럽다.
오늘 내 주인은 처음 가보는 길로 나를 데려가더라. 내 한 몸 지나가기 딱 좋은 오솔길인데 폭신폭신 걸리적거리는 것도 없는 게 마음에 들더라. 내 주인도 나만큼이나 좋아하는 표정이었지. 신바람이 난 주인이 간만에 줄을 끝까지 빼주며 "나루 뛰어!" 이러더니 정작 내가 한참 앞서가서 줄이 팽팽해지는데도 겨우겨우 따라오더라. 결국 다시 되돌아왔지 뭐. 이 길을 돌아서면 야산이 나오는데 거긴 주인도 처음 가는 모양이야, 혼잣말로 "아니, 언제부터 여기 길이 있었지..." 그러면서 걷더라. 조금 가다 보니 아름드리 참나무 한그루가 쓰러져있는데 주인이 그 나무 앞에 한참 서서 쓰러진 나무를 구경하더라. 나도 그렇게 키가 큰 나무가 쓰러진 건 태어나 처음 봤어. 하긴 고작 한 살 살고 이런 말 하는 것도 우습지만... 아무튼 난 잊지 않고 그곳에 내가 왔단 표시를 확실히 해뒀지. 사실 나는 요즘 모든 곳, 모든 것들이 신비로워.
내 나이 이제 10개월, 내가 바깥에 나왔으면 얼마나 나와봤겠어? 아마 오십 번도 안될 거다. 이제와 말인데 사실 우리 주인에게 서운해. 새벽에도 나가고 저녁에도 산책을 나가면서도 나를 데리고 나간 건 한 스무 번이나 될까...? 윗집 개, 나보다 석 달이나 어린 그 개 말이야. 우리 주인 아들 친구네 개인데 걔는 주인아주머니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산책을 시킨다고 하더라. 전에 우리 주인이랑 얘기하는 걸 들었거든. 부럽더라. 근데, 난 서운해도 우리 주인을 이해하기로 했어. 아침마다 나서며 하는 말을 들으니까 왠지 이해해야 할 거 같거든.
"얘들아, 엄마 출근한다. 너희들도 학교 잘 다녀와~! 밥 남기지 말고, 남은 반찬은 냉장고에 넣어두고 가"
이 말을 하루도 빼놓지 않고 하더라. 무척 중요한 말 같아. '출근', '밥', '냉장고' 나는 그게 나한테 해당되는 말은 아닌줄 알지만 사람들에겐 무척 중요하단 사실을 알게 됐지. 암튼 그 '출근'이라는 것 때문에 나는 바깥에 못 나가고, 하루 종일 집에서 고독을 반찬 삼아 껌이나 씹어야 하는 신세가 된 거지. 어쨌든 나는 이 출근하는 집에, 이 집 아들의 선택에 따라 오게 된 거지. 내가 2개월에 왔으니 이제 여기 와서 반년을 살아본 거지. 나는 사람들이 정해놓은 법에 따라 아마 말썽쟁이로 불리는 것 같아. 그 집 큰아들이 듣는 만큼 나는 야단을 듣거든. 밖에 나가면 사람들은 나를 보기만해도 척척 내 나이를 알아. '아기 같네? 몇 개월이에요? 아기네~ 아기!' 그러더라고. 덩치가 다 컸다고 어른이 아닌 건 사람이나 개들이나 같은가 봐. 솔직히 상관없어 내가 아기든, 어른이든 알게 뭐람. 나는 나의 시간을 살 뿐인데...
야산을 내려오니 바닥이 딱딱한 길이네. 낮은 벽돌 담이나 나무 울타리가 자주 보이더군. 나는 그 틈으로 마당을 들여다보느라 자주 걸음을 멈췄지. 평소 사람들이 다니는 공원길만 가다가 이렇게 개들이 사는 곳을 본 것은 처음이라 무척 신기했거든. 울타리 안에 사는 개들은 나와는 완전히 다른 곳에 살더군. 폭신해 보이는 너른 곳에서 맘대로 뛰어다니는 개부터 반듯한 나무 데크에서 한가로이 낮잠을 즐기는 개들까지... 좀 부럽더군. 처음엔 주인도 내가 개를 구경하는 것이 즐거워 보였는지 울타리에서 두어 걸음 떨어져 내가 마당을 실컷 구경하게 하더니 어느 집 높은 철문 앞에서 덩치가 내 5배는 되는 개가 '컹! 컹컹'하고 사철나무 열매가 떨어질 정도로 짖자 나보다도 더 놀라서 뒷걸음질을 치더니만 더 이상 마당 구경을 못하게 하더군. 우리 주인이 큰 개나 목소리 큰 개를 싫어하거나 무서워한다는 걸 오늘 알았어. 그러고 보니 산책할 때 아주 큰 개를 만나면 내 목줄을 짧게 다잡곤 빠른 걸음으로 지나갔어. 언젠가는 주인 아들과 산책 나왔을 때 만났던 적이 있던 개라 아는 체를 하려고 했더니 갑자기 바쁜 일이라도 생긴 것처럼 목줄을 휙 잡아채더니 '얼른 가자. 나루~' 이랬거든. 그래서 말인데 그 후로 덩치 큰 개들이 궁금하긴 해도 주인이 목줄을 당기면 이젠 그냥 지나가. 주인한테 밉보여서 이마저도 안 나오면 어쩌겠어... 나만 손해잖아?
오늘 좀 오래 산책을 나가서 주택가를 한참 걸었는데 그 이야기를 해줄게. 개들 말고도 나무 울타리 밖으로 고개를 내민 진한 꽃을 봤는데, 그건 맨드라미래. 냄새는 풀냄새 비슷한데. 코를 대보니 주인이 내가 처음 이 집에 왔을 때 내게 준 방석이랑 비슷한 촉감이더라. 난 그 느낌이 맘에 들어 한참 얼굴을 비벼댔지. 주인이 어서 가자 재촉할 때까지 말이야. 아 참... 그 맨드라미란 꽃에서는 까만 씨앗이 우수수 떨어지더라. 음... 만약 내년에 그 집 마당에 맨드라미가 왕창 피면 내 덕인 줄 알았으면 좋겠어.
오늘 내 주인의 버릇 하나를 발견했는데 주인은 길을 가다 사진 찍는 걸 무척 좋아하는 거 같았어. '찰칵' 소리 나는 그 네모난 물건 있잖아, 사람들이 코를 처박고 들여다보는 거. 오늘은 그걸로 하늘을 찍기도 하고 땅을 찍기도 하고 나무를 찍기도 하더라. 아무래도 날씨가 좋은 날엔 더 자주 그러는 거 같아. 처음엔 소리가 마음에 들어 그러는 줄 알았는데 오늘 자세히 관찰해보니 어떤 풍경이나 사물 같은 것에 다가가 누르는 걸 보니, 그 소리 때문은 아닌 것 같다는 걸 알았지. 오늘 그늘진 담장 아래서 희한한 식물 하나를 봤는데
내 꼬리를 꼭 닮았더라. 주인은 나를 세워놓고 그것도 찍더라. '나루야, 너 닮은 풀이다'이러면서 말이야. 나는 사실 그 꼬리 같은 풀보다 주인이 사진 찍을 때 근처서 죽여주는 냄새에 꼴딱 뒤로 넘어가는 줄 알았지 뭐니. 한참 주위를 맴맴 돌며 냄새의 진원지를 찾기까지 했는데 그걸 꺼낼 수가 없는 거야. 아... 이런 걸 바로 좌절이라 하겠지. 그 보도블록 틈새에 있는 닭고기 살점이 보이는데 말이야. 아무리 발톱을 집어넣으려 했는데 안 되더라. 시간이 더 있었으면 어쩌면 꺼낼 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주인은 또 줄을 팽팽히 당기며 발걸음을 재촉하더라. 그래서, 나는 이곳을 잘 기억했다가 다음에 다시 시도해보려고 확실히 마킹을 하고 돌아왔지. 시간의 양은 좌절이란 단어와 함께란 걸 알았지 뭐니.
그러고 보니 오늘 좀 성과가 있는 것도 같네. 모처럼 오래 걷고 뛰었더니 밤잠도 문제없겠고... 나는 말이지 바깥에 나가면 일단 최선을 다해 달리고 뛰고 뒹굴고 그러거든. 알다시피 나는 사람들처럼 그렇게 어슬렁어슬렁 늑장 피울 여유가 없으니까. 아참, 오늘 본 것 중 하이라이트를 깜박했네. 머리가 하얀 할머니가 유모차를 밀며 천천히 내게 걸어오더니 말을 시켰는데 어떤 말을 했는지 아니?
"너도 마실 나왔니? 나도 이 다리로 마실 나왔다. 날 좋제? 실컷 댕기고 가라. 니도 세월 못 비킨다."
사실 지금까지의 산책 역사상 이렇게 기분 좋은 말은 첨 들었어. 그동안 들은 말은 귀엽다든가, 털이 예쁘다든가, 활발하다든가, 애기라든가, 개 싫어해, 이런 말들이었거든.
나는 오도카니 서서 그 할머니를 한참 바라 보았단다. 허리가 90도로 구부러진 할머니가 유모차를 밀며 어슬렁어슬렁이 아닌 느긋하게, 아주 여유롭게 걸어가는데 태곳적 햇살이 그 등에 차곡차곡 내리는 것 같더란 말이지. 그 신비로운 모습을 보느라 자꾸 고개가 돌아가는 거 있지. 암튼 늘 그랬지만 오늘 산책도 다시 없을 산책이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