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덕분(?)에 몽펠리에의 국립 대학교 Paul Valéry 에 있는 어학당에 100% 온라인으로만 하는 수업이 처음으로 개강되었다. 온라인으로 수업을 받으면 수업을 따라가기가 힘들었기에 장거리에도 불구하고 학교에 직접 가서 대면 수업을 받는 것을 선호했다. 그러나 이번학기에는 모든 상황이 내가 비대면 수업을 받아야 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산업재해로 인해 다친 남편의 손발이 되어 주기 위해서도 나는 집에 머물러 있어야 했다. 모든 것에는 때가 있는 듯 싶다. 아무리 하고 싶어도 되지 않을 때가 있고 노력하지 않아도 상황이 잘 풀릴 때가 있는 걸 보면 말이다. 정말 인생 ‘운칠기삼(運七技三)’인 듯 싶다. 어쨌든 직장에서 사고로 잘 움직이지 못하는 남편의 뒤치다꺼리를 해야 되었기에 나는 온라인 수업을 신청했다. 다행스럽게도 코로나 이후에 온라인 수업이 의무화됨에 따라서 학생들도 온라인 수업에 적응을 하고 진화했으며 선생님 또한 모두는 아닐지라도 몇 명은 현장 수업과 거의 같은 양질의 수업을 제공할 정도로 진화를 보여주었다.
온라인 수업을 들어보니 많은 단점에도 불구하고 3가지 장점이 있다. 첫 번째는 당연히 학교에 통학하는 시간이 전혀 걸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내가 사는 곳에서 학교까지의 통학거리는 대중교통 시간만으로 왕복 6시간이 걸렸기에 이것은 하루의 1/4을 차지하는 시간이다. 학교에 갈 때는 새벽 4시에 기상해서 준비를 하고 첫 차를 타기 위해서 새벽 5시에 집에서 출발해야 했지만, 이제 한 시간을 더 잠을 자고 새벽 5시에 일어나도 괜찮았다. 그리고 버스를 타고 트람을 타고 걸어서 학교까지 도착하는 것 대신에 나는 집에서 아침을 먹으며 뉴스를 챙겨보고 수업이 시작하기 전에 새벽 공부를 시작할 수 있었다.
두번째 장점은 학교 통학 할 때 항상 가방 두개를 무겁게 들고 다녔다. 아침에 가면 저녁에 돌아오기 때문에 하루동안 마실 물, 도시락 가방은 손에 들고 책가방은 등에 메고 학교에 다녔다. 그래서 항상 허리는 물론이고 어깨도 아팠다. 이것은 마흔이 넘은 중년의 체력으로서 감당하기에 쉽지 않았다. 특히 항암치료 이후에 약해진 체력에 더 힘들었다. 그러니 집에서 듣는 온라인 수업은 가방을 들고 다닐 필요가 없는 것이 또한 큰 장점이었다.
세번째 장점은 온라인 수업으로는 내가 발표할 시간이 더욱 많아졌다는 것이었다. 학교 현장 수업에는 학생수가 약 17명 정도였다. 그러므로 현장 수업에는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소수가 발언권을 독차지했다. 그래서 어떤 날은 입 밖으로 말한마디 못하고 돌아오는 날도 종종 있었다. 그러나 온라인으로 진행되는 반에는 인원수가 12명으로 시작했지만 한달도 안되어서 절반이 사라졌고 나머지 6명 정도가 수업에 자주 참석했다. 3배가 더 적은 인원이었다. 그래서 우리 6명은 매 수업시간마다 균등하게 말할 시간이 많이 분배되었다. 선생님이 매주 다른 주제를 제시하며 학생들의 생각을 발표하게 했다. 학교 다니면서 처음으로 매 수업시간마다 발표할 시간과 기회가 주어졌다는 점이 커다란 장점이었다.
온라인 수업의 일상은 교통지옥을 매일 오고가는 대면 수업과 분위기가 너무나 달랐다. 우선 수많은 차량들로 붐비는 교통소음 대신에 내가 사는 프랑스 남부 시골 마을에서 매일 들려오는 부엉이 소리, 새소리를 들으며 아침 5시에 기상했다. 주변이 고요한 새벽 시간에 일어나서 나는 남편을 깨우지 않기 위해 가만히 움직인다. 간단한 아침에 커피를 마시고 내 방에 올라와서 복습, 예습, 그리고 숙제를 했다. 주중에도 주말에도 똑같은 일상이었다. 몸이 너무 힘들면 예외로 한 시간을 더 잠을 청해서 6시에 일어났을 뿐이었다. DALF C1 지문은 정말 많이 어려웠고, 시간이 정말 많이 소요 되었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있는 한 시간을 투자하는 수밖에 없었다.
B2와 C1의 가장 큰 차이는 암기해야 하는 단어와 표현의 양이었다. C1에 접어드니 태산같은 프랑스어 어휘들과 표현들이 쏟아졌다. 양이 많아졌을 뿐만 아니라 사용 어휘들의 수준도 당연히 어려워졌다. 읽기에서는 단순히 어휘암기를 많이 해야 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읽었던 것을 작문을 해야 할 때면 어휘 뿐만 아니라 동의어, 반의어, 등도 함께 암기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휘를 늘리기 위해 사전 속을 산책하라고 조언을 해 주던 선생님은 어찌나 쓰기를 잘하는지 요약정리와 synthèse를 써내는 기계 같았다. 얼마나 훈련을 하면 그 수준에 도달할 수 있을지 싶다.
온라인 수업은 월요일 아침 8시 15분부터 10시 15분까지였다. 쉬는 시간은 없었다. 가장 힘들고 어려운 수업으로 일주일의 시작을 맞이했다. 수업을 듣기 위해서는 반드시 텍스트를 읽고 문제를 풀어야 하고, 작문을 쓰는 숙제를 마무리 해야만 그 수업을 따라갈 수 있었다. 숙제를 하지 않고 수업에 참여했던 학생들은 점점 그 수업에 결석을 하기 시작했다. 12명의 학생으로 시작했던 수업이 2월이 지나고 6명으로 절반이 줄었고, 4월이 되자 3명 정도만 참가하는 수업이 되어 버렸다. 할머니가 Bretagne출신이고 본인은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캐나다 출신이며, 프랑스에 산지 15년째인 한 남학생과, 프랑스어를 전공하고, 프랑스 문학의 석사를 진학하려고 하는 성실한 여학생, 그리고 나!!! 이렇게 3명만 살아 남았다. 참으로 힘들고 어려운 수업이었다.
DELF B2와 DALF C1의 차이는 베를린 장벽과도 같았다. 매일 붙들고 공부를 해도 너무 어려워서 포기만 하지 말자라며 버텼다. 월요일 아침에 시작하는 수업의 숙제를 일주일 내내 붙잡고 있었어도 일요일 저녁.. 두뇌 회전이 한계에 달해서 더 이상 생각을 할 수 없을 때까지 붙들고 늘어졌지만 하지 못했던 날에는 월요일 아침 새벽 4시에 일어나서 결국 수업 시간까지 모두 끝냈다. 한번도 숙제를 안했던 날이 없었고, 결국 끝까지 나는 버텨냈다. 그리고, 마침내 시험에 통과해서 디플롬을 취득했다. 다행스럽게도 그 동안의 노력의 결과가 좋은 결실을 맺음으로써 끝이 난 것이다.
몽펠리에 국립대 어학당과 인연을 맺게 되었던 것은 2018년 유방암의 진단을 받았던 것이 계기가 되었다. 그동안 프랑스어를 배우고 싶었어도 나는 대중교통도 거의 없는 시골에 살고 있었으며 집에서 몽펠리에까지는 80km 떨어져 있었기에 너무 멀어서 프랑스어를 배우러 갈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게다가 나는 프랑스 남자와 결혼해서 학생이 아닌 주부였기 때문에 나에게는 집안일이 우선순위였다. 시골의 주택의 오래된 집에는 산다는 것은 해도 해도 끝나지 않은 산더미같은 집안일과 정원가꾸기, 집수리등을 해내야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런 모든 일이 나의 생활의 우선순위를 차지하고 있었기에 프랑스어를 배우러 대도시에 가야한다는 것은 감히 그런 마음을 품을 수 조차 없는 언감생심(焉敢生心)이었다. 그러나 유방암 진단을 받았던 것이 계기가 되어 혼자 병원에 다니며 암치료를 받아야 되었기에 나는 생존 프랑스어를 익혀야 했다. 그렇게 유방암이라는 사건이 오히려 프랑스어를 배울 수 있는 전화위복의 기회가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시작했던 생존 프랑스어를 시작으로 해서 더 체계적으로 프랑스어를 배우고 싶다는 열망에 나와 몽펠리에 국립대 어학당과의 인연은 2019년 9월에 시작했다. 그리고 2021년 5월까지 2년 동안 많은 스승들에게 프랑스어를 배웠다. 프랑스어 듣고 읽기, 프랑스어로 쓰는 법, 말하는 법, 프랑스 문화, 프랑스 문학, 환경, 경제, 음성학, 프랑스어 문법, 등 정말 많은 것들을 배웠고 많은 생각의 전환이 이루어지는 시기였다. 내가 어학당을 다니며 프랑스어를 배웠던 목적은 대학 진학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DALF C1까지 배웠던 이유는 앞으로 내가 프랑스에서 계속 살고자 한다면 나에게 필요했던 최소의 프랑스어 수준은 제대로 된 글쓰기와 말하기는 알아야 되는 DALF C1 정도였기 때문이었다.
2년동안 인연을 맺어왔던 어학당의 생활은 많은 추억을 안겨주었다.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과의 만남, 여러명의 박학다식한 존경스러운 스승들과의 만남, 폭우와 트람 추돌 사고로 집에 가지 못했던 일들, 코로나 이전, 코로나 시기 동안의 몽펠리에라는 도시의 변화를 지켜보았던 시간이었다. 내가 몽펠리에 폴 발레리 대학 IEFE 어학원에서 프랑스어를 배우는 것이 좋았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어학원의 수업이 언어뿐만 아니라 프랑스 문화를 이해를 하기 위한 통로를 열어주었다는 것이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언어 학습은 단순히 언어의 기술적인 측면에 그치는 것이 아닌 오히려 언어를 사용하는 나라의 문화적인 측면에서도 깊게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언어는 그 자체로 특정 사회나 문화의 가치, 역사, 사고 방식을 반영하고 있으며, 이러한 문화적인 맥락을 이해하는 것은 언어를 완전히 터득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학원은 나에게 프랑스 문화, 프랑스 문학, 프랑코폰(Francophone) 문학 등을 통해 알베르 카뮈의 책과 만나고 보들레르와 폴 엘뤼아르의 시를 읽고, 볼테르의 생각을 읽으면서 프랑스의 역사, 예술, 철학, 생활 방식 등을 맛볼 수 있게 해 주었다. 또한 환경에 관한 프랑스인들의 생각 뿐만 아니라 다양한 국적 출신의 학생들과 함께 의견을 나누며 그들이 자라온 환경에서 비롯된 그들의 생각 또한 엿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내가 만약 프랑스 문화와의 접점이 상대적으로 적은 한국에서 프랑스어를 배웠다면 언어만을 중점적으로 학습했을 가능성이 크다. 성과중심으로 경쟁이 치열한 사회에서 산다는 것은 문화를 배우기에 앞서 언어를 숙달하는 기술만 익히는 것만으로도 급급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고 말하고 쓰고 싶은 프랑스어는 단순히 단어와 뜻을 알고 그것을 전달하는 기교적인 측면에 불과하는 것이 아니다. 남에게 잘 보이고 싶다는 것에만 급급해서 유명인이 했던 명연설을 암기해서 흉내내는 것에 만족하며 게다가 그런걸로 사람들을 현혹시켜 많은 수익까지 창출하는 사람들에게 프랑스어를 배우고 싶지 않았다. 한마디로 깊이 있는 생각이 들어있지 않는 껍데기에 불과한 말잔치를 하고 싶지 않다는 말이다. 신동엽의 시에서처럼 ‘알맹이’, ‘아우성’, ‘두 가슴과 그곳’, ‘흙가슴’ 만 남고 모든 “껍데기는 가라”라는 말을 하고 싶다.
그러므로 나는 당연히 프랑스 국립대 어학원 IEFE의 교육기관에서 배웠던 것이 언어뿐만 아니라 문화까지 심층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기회였다. 게다가 외국인에게 프랑스어를 가르치는 열정적인 전문가 선생님들의 많은 질문들은 내가 기존에 가진 고정관념의 틀에서 벗어나오게 하는 기폭제 역할을 해주었다. 지금도 생각나는 질문 하나는 프랑스 혁명 기간에 사용된 처형 도구 기요틴(Guillotine)에 관한 것이었다. 나는 조제프 이냐스 기요탱(Joseph-Ignace Guillotin)이 제안해서 만들어낸 참수형을 하기 위한 잔인한 도구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러나 수업시간에 선생님의 기요틴의 배경에 평등의 개념이 깔려 있을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질문을 했다. 선생님들이 했던 많은 질문들 생각들은 더 확산되고 파생되어 내가 가지고 있었던 생각에 더 많은 질문으로 되돌아왔다. 몇 년이 지나도 여전히 그 때의 질문들이 생각난다. 결국 내가 생각하는 진정한 언어 학습, 구체적으로 나에게 프랑스어 학습이란 단순한 어휘와 문법 학습을 넘어서 프랑스의 문화적인 배경을 이해하는 것이다. 나는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통해 프랑스어가 가진 진정한 언어의 의미를 깨닫게 되고 이를 통해 자연스러운 프랑스어 사용이 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