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각론- [끝]

[픽션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by YT

‘이건 뭐지?’ 그는 [픽션들] 속에서도 가장 짧은 이 단편을 읽은 후 당혹감에 빠졌다. 도입 부분에 ‘검둥이의 기타 연주가 엉켰다 풀어지는 하찮은 미로와 같았다’라고 얘기하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특별하게 보르헤스의 다른 단편들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개념과 보르헤스적 주제의식과의 관련성을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도입부의 ‘미로’도 일반적인 은유일 뿐, 다른 의도나 특별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반복해서 3번을 더 읽었다. 하지만 소설은 여전히 손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리고 요약이나 할 요량으로 워드를 켜고, ‘각론- [끝]’이라고 썼을 때, ‘혹시 이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 생각을 써보기로 결심했다.

요즘도 공공기관의 공식적인 공문 말미에는 꼭 ‘끝’이나 ‘이상’이라는 말로 문서의 마지막을 표시하는 관행이 있다. 그리고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과거 영화가 끝날 때는 ‘The End’라는 자막을 표기하는 전통이 있었다. 이 단편이 쓰인 1944년을 감안할 때, 소설의 제목은 이처럼 영화의 엔딩 자막 같은 것은 아닐까? 단편 속 선술집 주인인 ‘레카바렌’은 반신 불구가 되어 비스듬한 지붕의 작은 방 창을 통해 하루의 지나감과 손님들의 들고남, 그리고 들려오는 소리를 감상한다. 그 창은 영화의 스크린이 되는 것이다. 창에는 저녁의 황혼이 물들고, 먼 곳에서 점점이 크게 다가오는 황량한 서부 영화 속 인물이 있고, 술집에는 그를 기다리는 과거의 숙적이 있다. 그들의 결투는 먼지를 일으키며 창을 통해 상영되고 그것으로 오늘 하루의 영화는 끝난다. 보르헤스는 창이 갖는 반영의 이미지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더욱이 레카바렌이 꼼짝 못 하고 누워있는 침대는 창에 비해 약간 낮아서, 화면 속 인물이 가까이 다가오면 영상은 사라지고 소리만 들리게 된다. 이것은 소설에 회화적인 이미지를 부여한다.

서론에서 보르헤스는 불변성과 수동성의 대조로 레카바렌을 사용했다고 하고, 이 단편의 사건과 이미지는 어느 유명한 책에 암시되어 있으며, 자신은 그것을 알아차린 사람에 불과하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것은 독자로서, 영화 감상자로서의 주인공의 수동성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스토리는 그 주인공에게 보이는 text가 된다. 보르헤스는 독자의 text 수용을 얘기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그가 느낀 영화를 보는 것 같은 이미지는 꼭 맞는 해석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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