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MP3

평생 음악만 들으며 사는 삶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by 비둘기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갑자기 친구 한 놈이 청진기처럼 생긴 물건을 목에 걸고 왔다. 저게 도대체 뭘까. 궁금했다. 친구에게 물었다.

“야! 이거 뭐야?”

친구는 우쭐하며 대답했다.

“이거 MP3야. 생일 선물로 받았어.”

분명 답을 들었지만,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티를 내지 않고 천천히 저 괴상한 물건의 용도를 생각해보았다. 귀에 꽂는 것은 카세트에 있는 이어폰과 비슷하군. 결론은 어렵지 않았다. 노래를 듣는 물건이 틀림없군.

정답!



한때 HOT의 열광적인 팬이었던 누나 덕에 우리 집엔 오디오 장비가 많았다. 워크맨(미니 카세트), CD플레이어, 테이프와 CD를 모두 들을 수 있는 거대한 오디오 플레이어. 모두 있었다. 하지만 친구가 자랑한 mp3는 그것보다 훨씬 더 작았다. 목에 걸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였고, 주머니에도 쏙 들어갈 크기였다. 훨씬 간편하게 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그땐 음악을 그리 좋아하지도 않았지만, MP3가 갖고 싶어졌다.



한동안 엄마한테 MP3 타령을 했다. 오직 한 친구만 가지고 있던 MP3이었지만, 나 빼고 다 있다는 거짓말도 보탰다. 그러던 어느 날, TV 채널을 돌리다가 홈쇼핑에서 MP3가 나오는 걸 봤다. 평소엔 쳐다도 안 보는 홈쇼핑 채널이지만, 그땐 뚫어져라 봤다. 쇼호스트는 MP3의 장점을 열심히 설명했다.

“여러분! 오늘 아이리버 MP3 소개해 드립니다! 이 mp3는 다른 MP3보다 무려 3배 빠른 전송 속도를 자랑합니다! 디자인도 좀 보세요. 엄청 귀엽죠? 블랙, 레드, 블루, 그레이 네 가지 컬러가 있으니, 취향대로 선택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포인트. 재생 시간! 이 제품은 AA 건전지 하나로 무려 40시간! 40시간 연속 재생이 가능합니다.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나도 걱정 없겠죠? 여러분 더 고민할 필요 있으신가요? 지금 바로 주문하세요!”



엄마가 설거지를 끝낼 때까지 홈쇼핑을 틀어놨다. 설거지를 마친 엄마가 다가오자 나는 말했다.

“엄마, 이게 MP3야.”

엄마도 내 옆에 앉아 홈쇼핑을 봤다.

TV 속 쇼호스트들은 나와 한 편이 되어 열심히 엄마를 설득했다.

“다시는 이 가격은 보기 힘드실 텐데요…. 이 기회 놓치지 마세요!”

엄마는 말했다.

“기계가 엄청 째간하니 귀엽네.”

엄마의 반응이 나쁘지 않아 기대를 품었다. 엄마는 몇 분 더 TV를 보더니 갑자기 외삼촌에게 전화했다.

“Y야. 집이야? 지금 채널 18번 한 번 틀어봐. 그래 00 홈쇼핑. 거기 나오는 MP3 비오가 갖고 싶단다. 그거 하나만 주문해주고, 다음에 외갓집에서 만날 때, 네가 비오 선물 주는 것처럼 줘라. 내가 돈 부쳐줄게.”



주문은 나도 충분히 할 수 있는데, 왜 그렇게 복잡한 과정을 거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선물 받는 주제에 불만은 사치였다. 내 손에 MP3만 들어온다면, 엄마가 사주든, 외삼촌이 사주든, 산타할아버지가 사주든 상관없었다. 그날부터 외삼촌을 만날 날만 기다렸다. 한 달쯤 뒤, 외갓집에서 친척들이 만나기로 한 날, 혹시나 외삼촌이 내 MP3를 챙겨오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했다. 다행히 그날 외삼촌은 MP3를 나에게 건네줬다. 내 생의 첫 MP3를.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노래를 듣기 시작했다. 처음엔 주로 인기 음악을 MP3에 담았지만, 노래를 점점 더 관심 있게 듣다 보니, 취향이 생겼다. 나만의 플레이 리스트를 만들기 시작했다. 수많은 노래를 듣고, 그중 맘에 드는 노래를 표시하고, 그 노래를 내려받고, MP3에 담는 일은 만만치 않은 작업이었다. 그 과정이 고되지 않고 즐거웠다. 평생 음악만 들으며 사는 삶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서로 경쟁하듯 크기를 줄여나가던 mp3는 어느 순간 화면도, 버튼도 조금씩 커졌다. 기능도 점점 많아졌다. 영상을 볼 수도 있고, 게임도 할 수 있었다. 작은 MP3로 충분한 행복을 느끼던 나도 두 번이나 새로운 MP3를 샀다. 왜 내가 새로운 MP3를 샀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잃어버렸나? 고장이 났나? 아니면 그냥 새것을 갖고 싶었나?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혹시 기억나는 사람?



그러던 어느 날 혁명이 일어났다. 청바지에 목폴라를 입은, 머리숱은 부족한데 수염은 많은 아저씨가 뉴스에 나왔다. 그는 수많은 사람 앞에서 자기 회사 제품을 멋지게 소개했다.

“오늘 우리는 혁신적인 제품을 세 개나 선보일 겁니다.

첫 번째, 터치로 조작할 수 있는 와이드스크린 아이팟.

두 번째, 혁신적인 휴대폰.

세 번째, 획기적인 인터넷 통신 기기.


정리하죠.

아이팟! 폰! 인터넷!

아이팟! 폰! 인터넷!

아이팟! 폰! 인터넷!

감이 오시나요? 사실 이것은 단 하나의 제품입니다.


우리는 이 새로운 제품을 ‘아이폰’이라고 부릅니다.”



포르쉐가 분명 존재하지만, 탈 수는 없듯, 강남아파트가 분명 존재하지만, 살 수는 없듯, 아이폰도 분명 존재하지만, 가질 수 없었다. 아이폰 대신 나는 여전히 ‘MP3! 폴더폰! 컴퓨터!’를 사용했다. 굳이 스마트폰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지금까지 없이 잘 살았는데, 앞으로도 없어도 잘 살 수 있겠지….


의외로 스마트폰은 빠르게 보급됐다. 나도 생각보다 빠르게 아이폰을 가지게 되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아빠는 새로운 휴대폰으로 바꾸면서 원래 쓰던 아이폰을 나를 줬다. 학교에서 아침조회 시간 휴대폰을 걷을 때, 당당하게 아이폰을 내자 모든 아이의 시선이 나에게 쏠렸다.

“와! 맹비오 아이폰으로 바꿨다!”

흐뭇한 마음과 겸손한 눈빛으로 대답했다.

“산 거 아니야. 아빠가 준 거야.”

그렇게 또 하나의 추억과 이별하게 되었다.

MP3야. 안녕.



집에 아직 예전 MP3들이 있나? 아니면 다 버렸나?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혹시 기억나는 사람?

keyword
이전 06화학교 앞 문구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