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결혼 전, 연애 시절 처음으로 맞이하는 새해였다.
"여보는 1월 1일에 제야의 종소리 들어?"라는 내 물음에 아내는 "우리 집은 보통 제야의 종소리는 안 듣고 집 앞에 산에 올라가서 일출을 봐"라고 대답했다.
한 번도 새로운 해의 시작에 떠오르는 일출을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크나큰 결심이었지만, 이번에는 한번 일출을 보기로 마음먹었다.
근처에서 괜찮은 일출 명소를 찾아보니
세종의 '비학산'이라는 곳에서 일출을 많이들 본다는 글을 인터넷에서 보게 되었다.
일출 보는 곳까지 편도 1시간 정도의 도보 코스로 아내와 첫 일출 장소로 적합하리라 생각했다.
12월 31일, 일찍 잠에 들고 1월 1일 새벽 4시에 기상해 비학산으로 향했다.
역시나 '일출 명소'답게 비학산 주차장에는 새벽부터 많은 차들이 있었고, 주차할 곳이 마땅치 않아 경사진 곳에다가 주차를 하기로 했다.
추운 날씨의 영향인지 근래 온 눈 때문에 경사로는 꽝꽝 언 빙판길이었고 차가 올라가지지 않는 것이었다.
하필 바로 뒤에는 비싼 외제차가 서 있었고, 자칫 잘못하면 미끄러져 사고가 날 상황이었다.
나는 바퀴가 헛도는 와중에 그 차와 사고가 나지 않게 필사적으로 후진으로 미끄러지는 차를 브레이크 잡아 겨우 주차를 할 수 있었다. '일출을 보고 내려오면 약간 얼음이 녹아 차를 뺄 수 있지 않아 있을까'라는 기대를 품고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이 우리의 고난의 시작일 줄은 그때 우리는 알지 못했다.
12월 말에 내린 눈은 평지에서는 다 녹았었기에, 아직 산에 눈이 쌓여있으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게다가 새벽 5시 무렵에 도착해 그 영하 기온에 눈이 꽝꽝 얼어 얼음 빙판이 되어있으리라는 것은 더더욱 몰랐다.
청바지에 운동화 차림으로 등산을 하는 사람은 우리 밖에 없었고,
주변에는 아이젠, 등산지팡이 등 제대로 된 장비를 착용하신 분들과 함께 새해 일출을 보러 비학산에 올라갔다.
겨우겨우 고생 끝에 비학산 정상에 올랐다. 새해 일출 행사로 떡과 따뜻한 차를 나눠주고 계셨고
시루떡과 따뜻한 차로 몸을 녹이며 일출을 기다렸다.
그러나 그 모든 고생이 무색하게도 그날 날씨가 흐려서 해가 떠오르는 장면을 보지 못했다.
이미 날이 훤히 밝았지만 해가 떠오르는 장면을 보지 못한 사람들은 아쉬움에 내려가지 못하고 서성거렸고, 우리도 그들과 같이 아쉬움에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결국은 내려가야지 하고 사람들과 같이 휩쓸려 내려가다가 보니 올라왔던 길과는 다른 게 아닌가.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려가다 이정표를 보고 충격에 빠졌다.
우리는 출발한 곳은 1 주차장이었는데 아뿔싸, 이정표에는 '2 주차장 방향'이라고 되어 있는 게 아닌가.
이미 적잖이 내려온 터라 다시 올라가야 할지, 그냥 내려가야 할지 고민이 됐다.
결국 "내려가다 보면 1 주차장으로 가는 갈림길이 나오지 않겠냐. 이 빙판길 다시 올라갈 자신이 없다"는 아내의 말에 따라 2 주차장으로 내려가기로 했다.
하지만 2 주차장 길은 우리가 올라온 1 주차장과는 다르게 너무 가파른 길이었다.
내려오면서 몇 번을 미끄러져 넘어졌는지, 몸은 상처투성이가 됐고, 우리는 거의 다리가 아닌 엉덩이로 빙판길을 썰매를 타며 내려왔다.
마지막에는 밧줄을 붙잡고 거꾸로, 거의 네발로 기어가다시피 하며 겨우 내려올 수 있었다.
고생 끝에 낙이 와야 하지만 아쉽게도 우리가 도착한 곳은 1 주차장이 아닌 2 주차장이었다.
지도를 찍어보니 걸어서 30분 정도... 가야 했지만 우리의 몸 상태로는 도저히 걸어갈 자신이 없었다.
날짜는 1월 1일 그것도 아침 9시 무렵... 택시 또한 안 잡히는 이 상황에서
우리는 '히치하이킹'을 해보기로 했다.
초면에 모르는 사람에게 태워달라고 부탁을 드려야 하는 게 쉽지 않아 몇 팀이나 보내고 나서야,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순간이 왔다.
정말 이 분마저 떠나면 걸어가야 할 것 같은 상황에 그분에게 말을 걸려고 다가갔는데 그분이 차에 오르며 세상이 떠나가라 "아이고 오오오오" 하는 소리를 내셨다. 너무 힘들어 보이는 상황에서 차를 태워달라고 해도 될까,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결국 아내가 용기를 내 그분께 1 주차장까지 태워달라고 부탁했고, 너무 다행히도 흔쾌히 오케이를 하셨다.
그래서 그분의 자녀들과 함께 차에 동승해 1 주차장에 갈 수 있었다.
새해 첫날, 모르는 사람에게 히치하이킹을 하게 될 줄이야.
아마 그분 또한, 모르는 사람이 자녀 두 분과 함께 한 5분에서 10분 정도 거리를 차로 태워다 달라고 하는 상황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 같아도 그 상황에서 선뜻 "태워다 드릴게요"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을 것 같다.
요즘은 확실히 예전에 비해 낯선 사람들에 대한 경계도 높아졌고 그만큼 사회가 흉흉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 주차장, 2 주차장 구별도 못해서 잘못 내려온 만신창이가 된 부부를 태워다 주신 그분 덕분에, 새해부터 따뜻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고, 그 마음을 느낄 수 있음에 너무 좋았던 하루였다.
그 후 매년 새해가 되면, 나는 그날의 배려를 기억하며 '오늘도 누군가에게 따뜻함을 줄 수 있는 그때 그 배려심을 간직하고 베풀 수 있는 사람이 되자'라는 소원을 빈다.
집에 도착해 떡국을 먹고 기절하듯 잠든 뒤, 나는 아내에게 물었다.
"여보는 어떻게 새해마다 이렇게 산에 올라가서 일출을 봐? 진짜 대단하다."
그러자 아내가 멋쩍게 대답했다.
"산에 올라가는 건 처음인데? 내가 말한 산은 동네 앞에 5분 정도 올라가는 동산이었어. 이렇게 등산한 건 나도 처음이야."라는 대답에
우리 둘은 서로를 바라보다가, 멋쩍게 웃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