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나에게는 치명적인 약점 아닌 약점이 하나 있다.
바로 영어를 못 한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나라 사람들이 다 영어를 잘하는 것이 아니지만, 나는 좀 심각하게 못 한다.
이제 영어를 못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자리 잡으면서 트라우마가 되어, 더욱 영어를 멀리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더 못하게 되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상황이다.
그래서 대학교를 갈 때도 영어 점수만 못 맞아 '21512'같은 등급을 받았고, 별명이 흥선대원군이었다.
대학교를 가서도 토익 점수가 발목을 잡아 취직 준비를 하는데 무척이나 애를 먹었던 경험이 있다.
그렇게 사회를 나와 회사에 와서는 사실 영어를 쓸 일이 거의 없어 무척이나 행복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지만, 한 사건을 계기로 영어 공부를 다시 틈틈이 하게 된 일이 있다.
아내와 강릉 여행 중 일이었다.
여행 중 평범하게 맛집 탐방을 하던 와중, 강릉에 '장칼국수' 맛집이 있다는 정보를 보고 찾아가 맛있게 먹고 나오던 순간이었다.
먹던 와중에 주방 한켠에 '전라도 쥬키니'라고 쓰여 있고, 초록색 길쭉한 캐릭터가 그려진 박스를 보게 되었다.
맛있게 먹고 나왔는데 아내가 물었다.
"여보, 쥬키니가 무슨 뜻인지 알아?"
"무슨 야채 같은데... 어디 사투리야? 쥬키니?"
"사투리 아냐. 영어 단어야."
"영단어라고? 잠시만..."
머리를 아무리 굴려봐도 처음 듣는 단어였다.
내 머리를 풀가동해 초록색 길쭉한 야채들을 머리에 떠올렸다.
'오이는 쥬키니 아니었던 거 같고, 고추도 페퍼였던 거 같고, 애호박..? 호박은 펌킨이었나, 파 모양도 아니고... 도대체 뭐지?'
수많은 야채와 채소들이 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지만, 내 입에서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아내는 웃으며 말했다.
"쥬키니는 중학교 수준인데? 여보, 이거 몰라?"
"중학교 수준이면 내가 모를 수가 없어. 내가 처음 들어본걸 보니... 조금 고급 단어야."
아내가 박장대소하며 웃었다.
"무슨 고급단어야. 호박이야. 호박."
"엥? 호박은 펌킨 아냐??"
"그건 커다란 노란 호박이고, 애호박처럼 길쭉한 서양 호박이 바로 쥬키니야."
너무 억울했다.
나는 단어는 정확히 기억은 못할지언정 처음 듣는 단어와 아닌 단어는 귀신같이 구분할 수 있는 편인데, '쥬키니'는 정말 처음 듣는 단어였다.
그래서 나는, 전라도 출신인 아내가 박스에 적힌 '전라도 쥬키니'를 보고 전라도 사투리를 알려주려는 줄 알았다. 그래서 쥬키니가 뭔지 물어봤으리라 지레짐작했을 뿐, 한 번도 그것이 영어 단어일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여보 영어 못한다더니 진짜 못하는구나~"라는 아내의 말에 크게 웃었지만, 한편으로는 마음 한구석이 찔렸다.
따지고 보면 영어 단어 하나를 몰랐을 뿐인데도 그 순간 나는 마치 세상 모든 배움을 놓친 사람처럼 작아졌다. 단어 하나 때문에 자존심이 상하는 게 우습기도 하지만, 나름 이야기꾼을 꿈꾸는 나로서는 언어를 모른다는 사실이 너무 큰 부끄러움이었다.
사실 글을 쓰는 데 국어 하나만으로도 충분할 수 있다. 하지만 결국 언어는 서로를 잇는 다리이고, 더 많은 세계와 접속할 수 있는 통로다. 내가 영어를 못한다는 건, 세상과 닿을 수 있는 창 하나가 닫혀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언어는 그만큼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창과도 같고, 내 책에 쓰이는 잉크와 같기 때문이다.
창이 좁으면 세상이 좁아 보이고 잉크가 마르면 펜을 쓸 수 없다.
창을 넓히고 잉크를 채우려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다시 배우는 수밖에 없다.
결국 나는 지금도 단어장을 펼치며, 늦게라도 창문 하나 더 열고 잉크 한 방울 더 채우려고 애쓰는 중이다.
" A는 Apple, B는 Bus, C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