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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영 Mar 11. 2022

IMF라는 강력한 MSG


   요즘은 동네에 흔한 게 반찬 가게라 편하게 반찬을 사다 먹고 있지만, 그래도 너무 가게 반찬만 사서 나르다 보면 왠지 아내로서 엄마로서의 직무를 유기하고 있는 듯한 미안함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미안함 해소 차원에서 맘먹고 이번엔 마트에 가서 흔한 식재료 '콩나물, 오이, 가지'를 집어든다.  '콩나물무침'이라도 하고, '오이무침'에 '가지구이'까지 해본다. 그렇게 내가 직접 만든 반찬들을 식탁에 올려놓고 나서야  가족들에 대한 미안함이 사라진다.

-쉬는 날 했던 가지구이-


 콩나물 무침의 주재료는 콩나물,  오이 무침의 주재료는 오이, 가지구이의 주재료는 가지다.  주재료는 모두 제각각이지만 그것을 만드는데 드는 기본 양념은 사실 거기서 거기다. 나는 요리 장인이 아니기에 더 그러할 수도 있지만 한국음식의 기본 반찬 양념이 사실 그러하지 싶다. 

 

'다진 마늘, 다진 파, 고추가루, 설탕, 소금, 간장, 참기름, 깨' 


뭐 이정도?

여기서 메인 재료에 따라 기본 양념 재료 몇가지를 가지고 어떤 비율로 조합할것이냐 정도의 차이랄까?

(아무리 반찬가게 단골인 워킹맘이라도) 주부 경력이 오래되다 보면 몇 티스푼 이런 것 따위는 필요없고 그냥 눈대중으로 다진 마늘 한 스푼 툭! 쪽파 타다닥 잘게 썰어서 몇 쪽 넣고, 소금 약간, 설탕 약간, 고추가루 착착! 그래도 왠지 맛이 좀 부족하면 넣어주는 비법소스가 있다. 요리에센스 연두!(아는 사람은 다하는 액체 조미료)

유기농 매장 자연드림 조합원으로서 매달 회비를 내고 유기농 재료를 쓰면서도 자신없는 반찬맛을 위해 한번씩 사용 중이다. 아 무슨 아이러니? 인생은 원래 이렇게 앞뒤가 안맞는 거라고 합리화를 시킨다.( 이런 지점에서 굳이?)


요리의 메인 재료가 콩나물이냐 오이냐 가지냐 에 따라 반찬 이름은 정해진다. 그걸 반찬으로 완성시키기 위해 들어가는 양념들은 그 반찬이름을 작명하는데 반영되지 않는다. 양념들은 그냥 '볶음, 구이, 무침'속으로 사라질 뿐이다. 그렇다는 것은 그 메인 재료 본연의 맛이 살아야 한다는 것일 터인데, 내가 만든 반찬들은 그 맛이 그맛이다. 요리에센스 효과가 강렬해서 일까?



 

 고2 때 같은 반에서 만나 화장실까지 같이 다닌 친구들이 있었다(여자 애들이란 친해지면 꼭 화장실을 동행하는 의리를 보여줘야 한다.그러다 싸우면 화장실을 같이 안감). 


Y와 S,  그리고 나.

셋은 비슷해서 친구가 된 거 같긴 한데 자라는 환경, 성격도 사실 제각각인 면이 많았다. 콩나물, 오이, 가지처럼 말이다. 셋이서 수다를 떨고 화장실에 가고 분식집에서 쫄면을 먹을 때는 분명 서로가 꿈꾸는 미래가 제각각이라 우리의 미래가 참 궁금했었다. Y는 차분한 성격에 책을 좋아하니  글을 쓰는 작가가 되고 싶다고 했다.  S는 영어를 좋아하고 잘하니 영문과에 간 다음 번역가가 되고 싶다고 했다. 나는  뭐 그때도 '교사'가 될거라고 하긴 했다. 훗날 작가, 번역가, 교사가 되어 우리가 만난다면 얼마나 멋지고 재밌을까 상상하곤 했었다.  


그렇게 제각각인 우리였지만, 

우리는 학교라는 양푼 안에서는 자꾸만 비슷한 양념이 뿌려졌다.

"공부, 야자, 특보, 시험, 비교, 석차, 서열, 경쟁, 대학"

 

그러다 고3 때  나라에 IMF라는게 터졌다.  수능을 마치고 대학원서를 쓰는데  IMF는 너무나 강력한 맛을 내는 MSG조미료처럼 우리에게 뿌려졌다. 담임 선생님은 우리에게 그랬다. 지금 나라에 IMF가 터져서 실직자가 속출하고 부도 나는 회사가 많다. 은행도 부도가 나는 판이다. 그러니 꿈 따위는 생각도 말고 뭘 하고 싶네 이따위 생각은 집어치우고 그냥 철밥통 직업을 가지는게 장땡이라고 했다(뭐 이렇게 노골적으로 말하진 않았지만, 이런 뉘앙스로 들렸다). 


 서로 다른 꿈을 이야기 하던 우리 셋, 그리고 반 친구들은 대학 지원 원서에 '교대, 사범대, OO교육과' or ' OO공학과'를 적었다. (실제로  친구 하나는 오로지 취업만을 위해 '기계공학과'를 선택해서 갔다. 그리고는 공대에 몇 안되는 여자가 되기도 했다)



  단 한번도!  교대를 가고 싶다고 한적이 없던 친구 Y는 교대에 갔고 초등 교사가 되어 살아가고 있다. 얌전하기만한 'Y'는 아이들에게 뭔가를 많이 말하는게 힘들고 하루하루가 지친다고 했다.

 영문과를 가겠다고 했던 'S'는 재수까지 해서 진짜로 '영문과'에 갔다. 재수를 해서까지 영문과를 가는 거 보니 정말 영어가 재밌고 번역가가 되고 싶긴 한가 보다 했다. 그러던 'S'는 어느 날 영문과를 자퇴했다. 다시 수능을 보고  '윤리교육과'에 진학했다. 도덕선생이 되기로 했단다. 임용고시에서 도덕과 경쟁률이 좀 낮고, 불안한 번역가의 길을 선택하기보다는 안정적인 도덕선생이 되기로 했다고 했다. 게다가 자기 아빠가 국가 유공자라서 가산점을 받을 수 있으니 쉽게 임용에 합격할 거라고 했다.

 

그리고 나?

교사가 되고 싶다고 가장 일찍부터 오랫동안 말해왔던 나는 오래~~학교를 다니며  시험의 굴레를 전전하고, 제일 겔겔거리다가 임용 2차 시험에서 낙제했다. 문턱까지 다 왔는데 결국 포기했고, 방황의 날들의 보냈다.  결국은 이렇게 '독서교실'을 만들었고, 아이들을 만나면서 선생 노릇은 하며 살아가고 있다.





 

콩나물 같았던 Y, 오이 같았던 S, 가지 같았던 나는 같은 양푼 안에서 비슷한 양념들로 버무려지다가 결국 IMF라는 MSG에 버무려져 버렸다. 그래서 재료 본연의 맛을 살린 콩나물 무침, 오이 무침, 가지 무침이 되지 못하고 MSG효과로 거기서 거기서인 맛이 느껴지는 무침들이 되어버렸다. 결국 그래서 비슷비슷하게 살아가고 있다.


 Y는 휴직을 반복하며 방황하지만 아이들을 하교시킨 후 빈교실에 남아 꼭 책을 읽는다고 했다. 도덕 선생이 된 S는 영어원서읽기 모임을 이끌어가는 가면서 영어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날들을 보내고 있다. 나는 독서교실을 하면서 이상 야릇한 갑질하는 엄마들을 상대하고 개념없는 아이들을 만나기도 하지만 어찌됐건 선생질을 해먹으며 하루 하루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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