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도 뱀도 아닌 사파리의 세계로
광고회사에 다니는 내내 나는, 용의 꼬리라도 붙잡으려고 고군분투했다. 그때는 모르고 지금은 아는 것이 있다면, 그중 하나가 모든 일, 모든 시각에 융통성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그 때 나는 계속 안 되는 일에 왜 그토록 매달렸을까. 그리고 왜 그렇게 용의 꼬리라도 붙잡으려 했던가. 그 생각을 뒤집는 어느 한 사람을 만났을 때조차도 나는 그 즉시 깨닫지 못하고 그 후로도 꽤 많은 시간이 지나고 결과론적인 허상에 이르렀을 때에야 깨닫게 된다. 어떤 사유는 너무 너무 늦은 후에 찾아와 회한이 되기도 한다.
잡히지 않는 용의 꼬리를 잡으려 여전히 고군분투 하던 그 때, 언젠가 크리에이티브 수업에서 만난 적이 있던 사람이 그 회사의 본부장으로 있고, 새로 들어온 안면있는 나에게 관심을 기울여주었다. 관심이란 다른 게 아니라 나의 일에 대한 기대였던 것 같았다. 그 회사에 3년 넘게 있으면서 처음 1년 반 정도는 그럭저럭 괜찮았던 것 같다. 그 사람의 기대에 적당히 부응하면서 충족시켜 주면서. 그는 나에게 3명의 카피라이터를 꾸려주면서 팀장을 맡기며 하나의 팀을 만들어주기까지 했으니까.
어느 날 술자리에서 그는 나에게 말했다. 직장생활의 목표를 빨리 분명히 하는 게 좋다고. 자신은 애당초 자신의 주제를 파악했고, 용의 꼬리보다는 뱀의 머리를 선택하기로 일찌감치 결정했다고. 그때는 그 말을 대충 흘려듣고. 그래 너는 뱀의 머리가 되라. 나는 용의 꼬리라도 붙잡아 언젠가 용의 머리를 꿈꿀 것이다. 용의 세계. 그 세계로의 진입만이 나의 변할 생각 없는 목표였다는 것. 그러나 항상 주변을 잘 돌아보고 현실을 직시하고 나도 나 자신을 현실에 대입시켜 변화를 꾀했어야 했다. 세상은 변하고 광고시장도 변하고 직장생활도 변하고 모든 것이 변한다. 산업도 변하고. 내가 4년을 못 채우고 그 회사에서 나왔을 때 그는 그 회사에서만 10년 넘게 있으면서 그 회사의 넘버2가 되어가고 있었다.
내 목표는 용의 세계였기에 뱀의 세계를 하대했으며, 용이냐 뱀이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정말 내게 맞는 세계가 어떤 것인가에 관한 진지한 성찰, 그리고 나아가 나의 주제 파악. 타이밍, 상황상 어떤 게 나에게 최적화된 선택인가 하는 가에 관한 성찰 후에 현명한 선택과 판단임을 알았을 땐 이미 많은 후회들이 내 곁을 스치고 지나간 후였다.
나 자신에 대한 신념보다 시장이 원하는 이상을 쫓은 나는 어쩌면 내가 발 딛고 살아가는 실체 없는 허상에 발을 디디며 조금씩 파열되어 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점점 나는 나를 잃어버리고, 종국에는 내가 진정 무엇을 원하는지 알지 못했던 것이다.
세계 이전에 내가 있다. 나의 세계를 먼저 확고히 하고 성찰하며 어떤 세계에 발을 디뎌야할지. 세상의 법칙이나 이상이 아니 내 자신의 내면이 원하는 진정한 방향성의 세계에 진입하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는 말을 꼭 하고 싶다.
그리고, 용도 뱀도 아닌 아프리카 대초원의 얼룩말이 되어도 좋다고... 다만, 자신이 원하는 것이기만 하다면 사파리의 일개미라도 좋다고 지금은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