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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씀 Jun 11. 2021

나무의 주름살, 사람의 나이테

세월이 들어 있는 말들


"사진작가 양반, 내 주름살 절대 지우지 말아요. 내가 이걸 만드느라 수십 년이 걸렸거든."
(잔느 모르 Jeanne Moreau, 전설적인 프랑스 여배우, 1928년생)




주름살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바람에 맞서면 물결이 생기듯, 세월에 저항하면 주름살이 생깁니다. 불의에 굴종하지 않고 얼마나 치열하게 인생을 살았는지, 그것의 척도가 바로 주름살입니다. 바람 부는 대로, 세월 흐르는 대로, 순응하며 곱게 늙은 모습이 좋아 보입니다. 그렇지만 나는 가문 논바닥과 굴곡진 밭이랑 같은, 척박한 주름살이 더 아름답다 생각합니다. 더 좋은 세상을 자식에게 물려주려고 평생 가난에 맞선 그분들의 주름살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스스로 묻습니다. 나는 얼마나 세월에 저항하고 있는지. 그분들의 주름살을 어떻게 만들고 있는지를. 



나이는 무엇으로 말하는가


늙는다는 것. 화가는 자기 그림이 제 나이고, 시인은 자기 시가 제 나이고, 시나리오 작가는 자기 영화가 제 나이다. 바보들만 자기 동맥이 제 나이다. 밥장 작가의 '밤의 인문학'에 나오는 문장입니다. 갑자기 내 나이는 무엇으로 말해야 하나 생각하니 먹먹해집니다. 오후 다섯 시 오십오 분을 가리키는 나란 시계가 퇴근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리 적지 않은 시간 동안 나는 무엇을 쌓으며 살아왔을까요? 바보처럼 늙은 동맥이 내 나이라 말해야 할까요?  동맥 속을 가열차게 흐르던, 청춘의 열정은 다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습니다. 세월이 다시 흐른 뒤에 또 누가 묻는다면, 이것이 나의 나이요! 자신 있게 내놓을 수 있도록 나의 글을 준비해야겠습니다.

 


나는 지금 늦여름


인생을 사계절로 볼 때 25세까지가 봄, 50세까지가 여름, 75세까지가 가을, 100세까지가 겨울이라 합니다. 나는 지금 엄청난 목청으로 매미 우는 늦여름과 초가을 사이쯤 되겠군요. 뜨겁다 못해 따끔따끔한 자외선 그대로 받으며 수확을 준비할 때지요. 늦여름이면 어김없이 태풍 한두 개는 맞을 것이고, 지루한 장마에 옷도 젖고 마음도 젖겠지요. 이런저런 풍파를 겪으며 제 혼자 단단해지는 벼처럼, 한편으론 사는데 짬이 좀 날 테고요. 슬슬 아침저녁으로 가을을 생각하며 냉정해지기도 하겠지요. 당분간 나의 여름을 좋아하기로 했습니다. 내 나이 예순을 지나면 가을을 좋아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다음은 겨울을 즐겨야 하겠군요. 그러다 내가 태어난 그 겨울에 이곳을 떠나기로 했습니다.



인생의 정오에서


정신분석학자 칼 융은 중년을 ‘인생의 정오(noon of life)’라고 했습니다. 중년이 되면서 인간은 이전까지 외형적인 것에 치중했던 삶에서 벗어나 삶의 의미, 자신의 본질적인 모습, 자신의 욕구에 대한 강렬한 자각이 일어나기 시작한다고 합니다. 이때부터는 직업적 성취를 위해 집중해 쏟던 에너지를, 자신의 내부에 쏟아붓게 된다고 합니다. 그런 것 같습니다. 나 역시 인생의 정오쯤에서 내 삶을 유턴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나이 먹을수록 아이가 되는 것은 중년의 꼭짓점에서 유턴하여 인생을 돌아가고 있어서 그런 겁니다. 그 길이 같은 궤도를 밟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실수로 허투루 살아온 흔적들을 내 손으로 지워가게 말입니다. 그러면 후회 없는 인생을 완성할 수 있으니까요. 그리하여 세상 출발점에 다다랐을 때, 이제 막 세상 밖 출발을 앞둔 이들에게 부끄럽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나이 들었다는 확실한 물증


사람은 태어나면서 앞으로 걷습니다. 인생의 오르막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생의 정오를 지나면 그렇게 걸으면 안 됩니다. 이때부터 내리막이기 때문입니다. 옆으로도 걷고, 때로는 뒤로도 걸어야지 여전히 앞으로만 걷고자 하면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요즘 나도 모르게 뒷짐을 지고 걷는 나를 발견합니다. 


그리운 맛이 많아졌습니다. 사람은 인생의 정오를 기점으로 이전까지는 새로운 맛을 찾지만, 이후부터는 그때까지 찾았던 맛을 다시 찾는다고 합니다. 어쩐지 진한 청국장이 자꾸 생각나더라니. 어디 음식의 맛뿐일까요. 사람 만나는 맛, 일하는 맛 등 세상의 모든 맛이 다 그렇습니다. 새로운 맛보다 잊었던 맛들을 그리워하게 되는 때가 오는 겁니다. 묵은지, 배추전, 콩잎 절임, 가죽나물 부각이 먹고 싶습니다.


콤콤하게 잘 익은 음식이 좋아졌습니다. 하루하루 콩 한 알 같은 정성이 쌓여 장독 가득 청국장을 부풀리듯, 진심을 다해 살아낸 하루들을 발효시킨 음식들이 좋습니다. 죽죽 잘 찢어지는 묵은지처럼 되고 싶기도 하고, 오랜 세월 먹기 좋게 익었다가 진국이 되어 만나는 그런 관계를 소망하기도 합니다. 나는 발효 인간입니다. 







Epilogue

나이테


나무는 나이를 기억하려 테두리를 친다

아무 고난 없이 평탄한 인생을 사는 열대지방 나무는 나이테가 없습니다. 아무리 오래 살아도 나이는 많지 않습니다. 해가 바뀌면 저절로 나이를 먹는 줄 알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추운 겨울을 인내하며 봄을 기다려도 보고, 여름 폭우처럼 성장하다가 한순간에 가을 낙엽처럼 추락도 해보고, 그 떨어진 찬 바닥에서 노숙도 해보고. 그런 세월의 우여곡절을 세포막에 담고 있는 것이 나이테입니다. 나는 나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나무처럼 인생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사람이 좋습니다. 나도 그처럼 우여곡절을 이겨낸 이야기를 쓰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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