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꿈을 비 맞게 할 순 없다

by 수인

대학생 때 <프린세스, 라 브라바!>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각 분야에서 성공을 한 멋지고 당당한 여성들의 이야기를 옴니버스 식으로 엮은 책이었다. 나는 책을 읽다가 다음과 같은 사진에 눈길이 멈췄다. 트렌치코트와 베레모를 쓴 한 남성이 첼로와 함께 서 있다. 우산을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비가 내리는 것 같다. 우산은 크기가 그리 크지 않아 남성과 첼로 모두를 감싸 안아 줄 수 없다. 사진 속 사람은 고민도 하지 않고 우산을 옆으로 기울여 첼로로 떨어지는 빗방울을 막아준다. 그리고 이 사진 주위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내 꿈을 비 맞게 할 수는 없었다.'라고. 아직 대학생이었고 꿈을 향해 본격적으로 뛰어들지도 않았지만 나는 이 사진이 눈에 밟혔다. 찰칵!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고 개인 SNS에 올려두었다. 언제든 두고두고 꺼내어 볼 수 있도록.


“내 꿈을 비 맞게 할 순 없었다” <프린세스, 라 브라바!> 중


나는 비를 맞으면 늘 아팠다. 지금보다 어릴 때는 체력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감기도 자주 걸리고 몸살도 자주 났다. 해야 하는 일을 제외하고는 항상 방에서 누워있었고, 우산 한번 깜박해서 비를 맞으면 하루 이틀 정도 앓아누워 있곤 했다. 그러고는 바랐다. 나를 지켜줄 우산이 있으면 좋겠다고, 크든 작든 크기는 중요하지 않고 그냥 나 하나 폭 들어갈 우산이 있으면 참 좋겠다고.


시간이 흘러 나는 사회인이 되었고 사회라는 세찬 비를 맞고 있었다. 역시나 칠칠치 못하게 우산이 없었으며, 온몸으로 그 세찬 물줄기를 견뎌내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문득 저 사진이 생각났다. 비가 내려도 내가 아닌 꿈을 지켜주는 저 사진 속 모습. 나는 꿈과 나를 일치시키고 본연의 나보다는 꿈을 지키고 싶었던 걸까. 아직 형태를 갖추지 않아 무엇인지조차 알 수 없었던 꿈을 지키면 나도 지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걸까.


흔히들 맷집을 키우라고 말한다. 이 험난한 사회 속에서 살아가려면 맷집이 세져야 한다고. 그 어떤 누가 다가와서 괜히 나를 때리고 걷어차도 끄떡도 않는 맷집이 있어야 네가 살아남는다고. 나는 한마디로 맷집이 약한 사람이었다. 몸도 마음도 여려서 툭 건드리면 눈물이 쏟아지는 사람, 나는 얼마나 위태로워 보였을까. 그러나 나는 조금 더 나이를 먹어도 여전히 우산을 잊고 다녔고 그래서 내가 강해지기로 마음먹었다. 우산이 없으면 내가 비옷을 챙겨 입어야 했다. 그렇게 나를 보호하기 위한 옷을 몇 겹씩 껴입게 되었다.


이제 나는 사회생활을 한 지 십 년이 조금 되지 않았다. 그러나 분야를 이리저리 바꿔댄 탓에 아직도 신입의 단계에 머물러 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신입이지만 신입 같지 않은 포스와(?) 마인드로 무장한 중고 신입이 되었다. 그럼에도 신입은 신입인지라 비가 오면 오는 대로 또 두들겨 맞았다. 그날도 지난 일 년 간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터덜터덜 집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눈물이 차오르고 코가 빨개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지만 이제는 울고 싶지 않았다. 그러던 중 한 사람이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게 보였다. 나도 모르게 같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큰 반원형의 무지개가 건물들 사이에 걸려 있었다. 그렇게 큰 무지개는 11년 전의 제주공항에서 비행기 창문 너머로 본 이후 처음이었다. "빨, 주, 노, 초, 파, 남, 보" 무지개의 결 따라 하나하나 색을 세어보았다. 무지개 속에는 정말 빨주노초파남보가 다 들어있었다. 어릴 때 무지개는 빨주노초파남보라고 배웠지만 한 번도 일곱 가지 색을 다 본 적이 없었기에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는데 거짓말이 아니었다. 무지개는 선명한 일곱 빛깔로 빛나고 있었다.


이런 아름답고 신기한 광경을 오랜만에 본 터라 계속 하늘을 올려다보며 사진을 찍었다. 자연의 아름다운 광경이 핸드폰 카메라에 그대로 담기지 않기도 했고, 또 이런 아름다움이 시야에서 사라지는 게 아쉬워서 계속 올려다봤다. 사진 찍느라 우산도 내팽개친 채, 나에게 떨어지는 비를 온몸으로 받으며 나는 오도카니 서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쳐다보든 말든 나만의 시간을 만끽했다. 그러고는 문득 저 무지개를 보기 위해 내가 기꺼이 비를 맞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찬가지로 힘들었던 시간도 내가 기꺼이 선택한 것이었음을 그제야 알아차렸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기 위해, 내 마음을 따라가기 위해, 더 큰 무지개를 보기 위해 그 누구도 아닌 내가 결정하고 선택한 것이라고, 그렇기에 지금 내리는 이 비를 맞아야 한다고.




얼마 전에도 비가 왔다. 요새는 비가 꽤 자주 내린다. 이제는 비 올 때 우산을 가지고 있으면 이상할 정도인 나는 역시 우산이 없었고, 밤이라 우산을 살 곳도 없었다. 역에서 집까지는 10분가량의 거리, 그래 맞지 뭐! 나는 의연하게 마음을 먹고 역을 나섰다. 비는 생각보다 훨씬 더 거셌다. 나는 나도 모르게 들고 있던 노트북을 추켜올려 품에 안았다. 내가 쓰는 글과 나의 이력과 사진이 들어있는 소중한 노트북, 이 노트북을 꼭 끌어안은 채 덤덤히 빗속을 걸어갔다. 빗줄기에 간혹 눈을 뜨기가 어려웠고 온몸은 갓 샤워하고 나온 것처럼 다 젖어버렸다. 문득 고개를 들어 비가 쏟아지는 어두컴컴한 하늘을 바라보았다. 생긋, 나도 모르게 하늘을 향해 웃어 보였다. 나는 비를 맞고 있었지만 괜찮았고 내 품 안에 담긴 새로운 꿈도 지키고 있었다. 십여 년 전 책에서 보았던 그 사진 속의 모습이 현실이 된 순간이었다.


앞으로도 아플 일이 많을지도 모르겠다. 아프지 않으면 그게 사랑이고 인생일까. 내리는 비에 그저 아팠던 나를 지나, 그 비에 대항하기 위해 내가 아닌 나로 무장했던 시간을 지나 나는 이제 나답게 서서 그 비를 온몸으로 맞으면서도 꿈을 지킬 수 있게 되었다. 여전히 흔들리고 징징대는 울보이지만 나는 기어코 내리는 비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이제 비가 오는 게 사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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