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홍길동, 한국 교사들
학기 말 생활기록부 작성이 끝났다. 그러나 속이 시원한 기분은 느끼지 못했다.
부장님의 지침 때문이었다.
"학생 평가 때 알죠? 노력 요함은 웬만하면 쓰지 맙시다~!"
학기 말이면 수행평가 결과를 마무리한다. 중간고사, 기말고사의 개념은 사라진 지 오래고 수미양가나 매우 잘함~미흡의 표현도 사라진 지 꽤 됐다. 지금은 수시로 수행평가를 진행한다. 평가 수준도 매우 잘함, 잘함, 보통, 노력요함의 4단계 평가 방식을 따른다. 미흡하다, 못한다, 모자란다, 멍청하다의 무시무시한 표현도 아니다. 노력요함이라는 아름답고도 따뜻한 표현이지만, 요즘 교사들은 노력요함도 쉽사리 입력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다. 학부모의 민원, 복잡한 이의 제기 절차 때문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도 노력요함은 학생의 노력이 부족하다고 해석되기보다, 교사의 지도가 부족하다고 해석되기 때문이다. 학생이 노력요함을 받기까지 교사는 뭘 했냐는 것이다. 노력 요함의 아이들을 지도할 여유가 있으면 좋으련만, 교사들은 아이들을 내보내고 2시간 정도의 시간 내에 행정업무와 다음 날의 수업을 모두 준비해야 한다. 심지어 기초학력이 심히 부족한 아이들을 단기간에 보통 이상으로 만들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이러한 탓에 교사들은 평가를 매우 쉽게 내고, 웬만하면 좋은 점수를 주려고 한다.
노력요함을 노력요함이라고도 부를 수 없는 세상이라니... 누구에게도 큰 득이 없다. 아이들은 객관적이고 엄격한 평가를 받지 못한다. 자기를 되돌아보고 성장할 기회를 놓친다. 또 공부의 큰 동기를 얻지 못한다. 라떼는(나 때는) 전 과목 백점과 1등을 목표로 공부하지만 지금 아이들은 90점을 목표로 공부한다. 90점만 돼도 매우 잘함을 받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교사에게도 득이 없다. 교사는 엄격하고 합리적인 평가권을 놓친다. 그 결과 교권은 끊임없이 하락한다. 단기적으로는 학생도 교사도 마음 편하지만, 장기적으로는 모두에게 득이 없다.
"80점 학생을 잘함을 준다고? "
"서로 피곤할 일 없으려면 어쩔 수 없지 뭐."
교사들이 모여 평가 기준을 작성할 때 자주 나오는 대사이다.
수행평가뿐만 아니라 학기말 종합의견에도 명확한 의견을 적시하기 힘들다. 생활기록부에는 학생의 전반적인 학교생활을 관찰하고 학생에 관한 의견을 쓰는 자료가 있다. 교육부는 긍정적인 표현으로 자료를 기입하라고 강력하게 권고한다. 못한다라는 말 대신 그 학생이 실제로 할 수 있는 것 위주로 작성하고, 단점을 쓸 때는 항상 개선 가능성을 함께 명시해야 한다. 단점을 쓸 때도 관련 행동들을 상세히 누적하여 기록한 자료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이런 탓에 많은 교사들이 영웅 소설을 쓸 때가 많다. 장점을 최대한 극적으로 강조하고 단점은 최대한 숨기거나 완곡한 언어로 돌리고 돌려 휘향 찬란한 희망의 가능성과 함께 종합 의견을 써내리고 있다. 물론 교사도 학생도 서로 기분 좋게 헤어질 수 있지만, 과연 이것이 교육적인 효과가 있을까? 학교가 합당한 평가에 기반한 건강한 권력을 유지할 수 있을까? 학생과 학부모는 객관적인 평가에 기반하여 학생의 더 나은 성장을 도모할 수 있을까?
올해 한 제자의 학기말 종합의견을 작성할 때 부장님의 피드백을 받았다. 그 학생의 단점을 부드럽게 돌려 돌려 고민을 반복반복해 써 제출했다. 하지만 부장님께서는 학부모의 입장에서 의견을 바꿔 써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하셨다. 부장님의 버전은 그 학생의 단점을 더욱 완곡한 표현이었다. (그 학생 특성 상 그 문장을 보고 진지하게 반성할 것 같진 않다.) 큰 문제도 만들기 싫고 얼굴 붉힐 일도 마주하기 싫었다. 결국 부장님의 버전으로 최종본을 제출해 모든 서류가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찝찝함은 가시지 않는다.
홍길동이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는 답답함이 내 가슴에도 깊이 내려앉는다.
노력 요함을 노력 요함으로 부르지 못하는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