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리 Oct 12. 2023

0이 하나 더 붙었다

프리랜서의 멋짐이란

  뜻밖의 부수입이 생길 거 같다. K-pop 블로그 작가를 모집한다기에 구글폼에 지원서를 작성해서 지원해 봤고 일을 하게 됐다. 면접은 메타버스에서 보았다. 메타버스를 수년째 남일 구경하듯 대했는데 급 이용하게 되었다.  


 원래도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것이 아닌 데다가 근 몇 년간 영어를 읽거나 고리타분한 시험용 문법을 따져대기나 했지, 영어로 말을 한 적이 별로 없었는데 영어로 면접을 보다니, 꽤 곤욕이었다.


 그래도 면접을 본 대표는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영어는 좀 부족해도 내 글이 마음에 든다고 했다. 따로 영어 공부 과정을 제공할 수도 있다고 했다. 최종 편집자도 따로 있고 말이다. 블로그 작가라고 해서 블로그에 글을 쓰는 줄 알았는데 따로 사이트가 있었다. 그곳에 영문과 한국어 기사가 동시에 올라간다.


 그렇게 13시간 시차를 뚫은 미팅을 마치고 의견 조율 끝에 내 첫 기사는 걸그룹 에스파 새 싱글 발매로 하기로 했다. 앨범이 나온다며 적극적으로 대표를 설득했다. 걸그룹 에스파는 내 동생이 카리나가 비현실적으로 예쁘다길래 호기심에 찾아보다 알게 됐다. 근데 옆에 있는 윈터가 좀 더 내 스타일이었다. 비슷하게 예쁘면 고양이상보다 강아지상을 선호하는 것 같다. 처음에는 그저 예뻐서 좋아했다. 동성애 성향이 있다든가 그런 거랑 상관없다.


 그렇게 관심이 생겨서 유튜브 영상 몇 개 봤을 뿐인데 알고리즘이 알아서 연관 동영상과 쇼츠를 보여주었다. 접속만 하면 떴고 반강제로 에스파를 점점 알아가게 됐다. 에스파 윈터는 예뻐서 좋아했는데 알고 보니 노래도 잘하고 재주가 많은 친구였다. 특히 손목을 360도로 돌리는 개인기는 놀라웠다.


 그렇게 유튜브에 접속해서 심리 영상을 보거나 타로카드를 보던 내가 걸그룹 에스파의 영상을 보는 시간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르세라핌과 뉴진스까지 손을 대고 있었다. 그러다 케이팝 기사까지 쓰게 되었다. 세상일은 참 알 수가 없지.


 서평 한 번 쓰면 만원인데 이건 건당 10만 원이다. 0이 하나 더 붙었다. 통상적인 급여가 아닌 형태의 소득으로는 두 번째이다. 지난달에 뭣도 모르고 서평 두 번 쓰고 실업급여 이틀 치 깎여서 적잖게 속이 쓰렸는데 뭔가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만원 벌자고 일일 실업급여를 통으로 날릴 생각은 없었기에 피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실업 급여 교육 때 내가 제대로 숙지를 못한 것인지. 여하튼 알고 한 짓은 아니다. 그래서 이번  돈 받는 서평 제안은 메일로 제의가 오기도 하고 해서 살며시 외면하고 있었다. 그렇게 미팅을 하는 데 미팅에 참여한 사람들이 프리랜서라는 단어를 반복해서 사용했다. 프리랜서라.


 수험생일 때 중고책을 만 원 받고 판 적이 있었다. 그런데 입금액을 확인해 보니 만원이 아니고 28만 원이 입금되어 있었다. 구매자가 닌텐도 스위치도 그날 중고로 샀는데 실수로 내 계좌에 입금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황급히 차액을 돌려줬는데 그때까지는 몰랐다. 내가 보이스피싱 삼자 사기를 당한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내 계좌에 28만 원을 넣은 사람은 나랑 거래를 한 사람이 아니었고 내가 차액이라고 보낸 계좌는 나랑 거래를 한 사람의 것이 아니었고 그 계좌 주인도 모르는 사이 벌어진 일이었는데 그 돈은 뭔 일인지 사라진 모양이다. 물론 내가 책을 보낸 주소도 나와 거래를 한 사람의 것이 아니고 말이다. 뭐가 뭔지 복잡했지만 이미 수십 차례 동일한 수법으로 사기를 치고 있었다. 이런 소액도 보이스 피싱 사기의 대상이 될 줄은 몰랐다.


 받을 사람 없이 보낸 책이 결국 수취인 불명으로 되돌아왔고 나는 반송 택배비를 지불해야 했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산다는 사람이 몇 명 더 있었는데 먼저 연락했다는 이유만으로 연락도 잘 안 되는 사람 공부하느라 그런 줄 알고 기다렸다가 판 것이었는데 후회가 되었다. 나름 증거자료이기도 하고 사기당한 물건을 다른 사람에게 다시 팔기도 찝찝해서 그 불쾌한 반송물을 내 방에 모시고 있어야 했다.


 불쾌한 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결국 경찰서에서 전화가 왔고 나는 경찰서에 출두해야 했다. 그렇게 화려한 번화가 뒤편 눈에 띄지 않는 외진 곳에 있는 입구부터 스산한 경찰서에 들어가서 사이버 범죄 수사 사무실로 향했다. 그곳은 경찰들이 쉴 새 없이 전화로 업무를 보고 있었으며 전화 내용의 팔 할은 중고나라 거래였다.


 자리에 앉아 사건 경위를 설명했다. 공무원 수험생인데 안 쓰는 수험서를 하나 팔게 되었고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된 거라고 설명했다. 그게 사실이니까. 그나저나 손해가 막심했다. 소액이지만 돈 낭비에 시간 낭비에 수치심까지 감당해야 했다. 진술서를 작성하던 경찰관이 직업을 묻기에 거듭 공시생에 백수라고 말하니 “프리랜서시군요!” 하며 자기 마음대로 프리랜서라고 진술서에 적었다. 서명을 하려고 진술서의 앞면을 보니 정말로 대문짝만 하게 프리랜서라고 적혀 있었다.


 그때는 프리랜서라는 그 단어가 나랑 굉장히 상관없는 단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아니었다. 현실이 되어버렸다. 그 경찰관 미래를 본 것일까. 아무래도 혐의가 있는데 무직이면 내 입장이 더 곤란해지니 배려를 해준 편이 더 사실에 가깝겠지만 말이다. 미래를 본 것과 상관없이 어쨌든 정말로 프리랜서가 되어버렸다. 월급 말고는 돈 벌 구석이 없을 줄 알았는데 말이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변변찮은 사무직을 전전하는 것을 계속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시간이 가면 내 처우가 갈수록 더 좋아지기는커녕 더 나빠질 일만 남은 것 같았다. 그래서 선택한 공무원 수험생활이었다. 적은 돈이라도 따박따박 받으면서 할머니 돼서도 월급 걱정 없이 앉아서 일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내가 보고 경험하는 세상이 작아서 그렇게 생각했을 뿐이었다. 꼭 월급쟁이 말고도 어떤 형태로든 돈을 벌 수가 있었다.


 곧 사이트에 올릴 기사를 작성할 것이고 이번 달 실업급여도 하루치 깎이겠지만 상관없다. 오히려 좋다. 덕질이 돈이 되다니. 생각보다 세상은 관대했다. 살이 후덕하게 쪄도 필라테스 센터 인포에서 일을 하고 영어가 완벽하지 않아도 영어 기사를 쓸 수 있고 말이다. 이러려고 좋아한 건 아니었지만 걸그룹 에스파를 좋아하길 잘한 거 같다. 도서 서평 건당 만원, 케이팝 기사 건당 십만 원, 다음에는 백만 원이다. 0이 계속 쭉쭉 붙어 나갔으면 좋겠다.


이미지 출처 : 픽사베이


이전 02화 나는 나에게 소속되기로 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