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결에 남편이 '씨발'이라고 외쳤다. 나쁜 꿈을 꾸는 줄 알고 손을 뻗어 토닥였다. 이내 남편이 피식거리길래, 다시 좋은 꿈을 꾸나보다 하며 안도하며 잠들었다. 잠에서 깨어난 남편이 말하기를 꿈에서 내가 괴롭혔다고 했다. 하지 말라고 해도 내가 계속 괴롭혀서, 참다못해 욕을 했다고. 그러면서 설핏 잠에서 깼다고 했다. 그런데 마침 내가 다독거려서, 아이러니한 상황에 웃음이 새어 나왔다고 했다. 결국 나는 그를 괴롭히고 달래준 셈이었다. 그 웃음의 이유가 나중에서야 이해됐다.
남편이 욕하는 걸 들으니 내가 '램수면 행동장애'로 잠결에 욕했을 때가 생각났다. 나는 그때 욕뿐만 아니라 멱살을 잡고, 물건을 던지려고 했으니 훨씬 심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스트레스도 줄었고, 양압기로 수면의 질도 훨씬 좋아졌다. 어쩌면 그때의 나는, 내 안에서 아빠의 모습이 비쳐 나오는 게 싫었을지도 모른다.
술이 깬 아빠는 따뜻한 말과 훌륭한 조언을 해주는 둘도 없는 좋은 부모였지만, 술에 취한 아빠는 정반대였다. 아빠는 술에 취하면 자면서 욕을 했다. 끊임없이 했다. 방문을 넘어서 쳐들어오는 욕설은 잠자며 듣기에는 불편했다. 아빠의 욕설은 잠든 나를 깨우곤 했다. 그때 나는 언어를 무기처럼 쓰는 어른을 증오했다. 그러나 자라면서 나는, 언어를 무기로 삼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려운 세계를 배우고 있다. 하지만 최근에 꼭 욕을 해야지만, 언어폭력인 것은 아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는 반려견 봄비와 산책을 하던 날이었다.
봄비는 산책을 할 때 마음이 급하면 걸으면서 똥을 싸는 이상한 특기가 있다. 그리고 나는 웬만해선 산책할 땐, 길과 봄비의 똥구멍만 보고 다닌다. 그런데 그날은 내가 봄비가 똥을 싸는 걸 못 봤고, 돌아온 길을 다시 되돌아봤을 때도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앞으로 가려던 찰나였다.
"아줌마! 개가 똥을 쌌으면 치워야지!"
불호령 같은 목소리에 뒤돌아서 죄송하다고 얘기했다. 아주머니가 가리킨 부분을 보니 잡초 사이에 똥이 있었다. 봄비의 똥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아주머니가 우리 개의 똥이라고 했으니, 치우는 게 맞았다.
"저기도, 저기도 있잖아!"
양산으로 그 뒤쪽 방향까지 찔러가며 소리를 지르는데 반려인으로서 낯부끄러웠다. 내가 똥을 치우지 않는 사람이라니.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똥을 치우면서도 이 똥이 누구의 똥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근처의 시선이 일제히 나에게로 쏠렸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똥을 모두 치우고 다시 산책을 이어갔지만, 그 작은 일로 마음 한가운데가 짓눌린 듯했다. 꼭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었을까, 나는 어떤 부분에서 이렇게 마음이 상한 걸까 고민해 봤다. 나는 아줌마가 맞지만, 아줌마라는 단어와 억양이 굉장히 폭력적으로 들렸다. '아줌마'라는 단어는 사전적으로 봤을 때, 부정적인 뜻이 없는데 나쁜 말로 느껴졌다. 그 단어는 나를 한순간의 '개의 뒤처리 책임자'로 만들었다. 이름도, 개의 부모도,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저 똥 치우는 사람이었다.
꼭 '씨발'같은 비속어가 아니어도 충분히 폭력적인 언어 표현을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아주머니는 단순히 반려인들이 '똥을 잘 치웠으면' 하는 마음이었겠지만, 나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공격을 당한 느낌이어서 폭력적으로 받아들였을 수도 있다. 말은 입에서 나와 귀로 들어가지만, 마음에 닿을 때야 비로소 언어가 된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말하기 전에 언어의 온도를 먼저 살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