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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흔한 단어 30화

거울효과

by Carroty

다이어트를 시작해도 음식에는 좀처럼 진심이 되지 않던 내가, '냉장고를 부탁해'를 보면서 요리에 진심이 되기 시작했다. 바쁜 스케줄 속에서도 손수 요리를 하는 연예인들을 보며 반성했다. 그들의 부지런함이 내 게으름을 비추는 거울 같았다. 남편이 오징어뭇국을 먹고 싶다는 말에 오징어를 손질했다. 그리고 난생처음 오징어볶음, 오징어뭇국을 성공적으로 해냈다.


이제 내가 못하는 요리는 콩나물국 하나밖에 없다. 콩나물국에 얽힌 이야기는 신혼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콩나물국을 끓이던 중 새우젓을 살짝 넣어서 간을 하려고 했다. 남은 새우젓의 양이 얼마 안 되는 줄 알고 전부 넣었더니, 콩나물국이 아닌 콩나물 새우젓국이 되어버렸다. 그 뒤로 남편은 그때의 악몽을 이루 말할 수 없다며, 내가 해 준 최악의 요리로 새우젓국을 꼽기도 한다.




사회생활을 안 하다 보니 부쩍 외로워졌다. 매일 만나 대화를 나누는 사람도, 연락을 하는 사람도 같이 사는 한 사람뿐이기 때문이다. 남편이 출근하고 나면, 집 안은 고요했다. 음식물 쓰레기 건조기 돌아가는 소리, 반려견 봄비의 발톱이 타일과 부딪히는 소리, 그리고 종이 넘기는 소리뿐이었다. 용건이 없으면 먼저 연락을 잘 안 하는 터인 내 성격이 문제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노는 사람이 일하는 사람에게 연락하자니 미안함이 앞섰다. 그러다 보니 외부자극이 굉장히 줄어들었다.


책, OTT, 유튜브에서 얻는 자극이 전부였다. 여러 구독 서비스를 이용하지만, 요즘 내가 보는 건 오직 '냉장고를 부탁해'뿐이다. 그래서 요리를 더 자주 하게 됐다. 좋아하는 채널이 있지만, 숏츠 알고리즘을 잘못 타면 시간을 헛되이 쓰게 된다. 때문에 일부러 자제한다. 그러다 보니 어떤 것에도 흥미를 느끼기가 어려워졌다.


매일 연재하는 '남편에게는 비밀입니다 시즌2'를 위한 삶을 사는 것만 같았다. 물론 숨 쉬고, 먹고, 자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지만 그것 말고 보람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내가 하고 싶었던 글쓰기를 실컷 할 수 있는 시간이 있는데도 누리지 못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느샌가 열정이 사라진 건가, 나 스스로를 돌아봤다. 그리고 내가 가장 열정을 느꼈던 순간은 언제였던가를 떠올려봤다.


유튜브에서 백윤학 지휘자의 영상을 처음 봤을 때였다. 숏츠 알고리즘을 어떻게 탔는지, '자, 이제 누가 지니지?'라는 제목의 영상은 나를 단숨에 그에게 빠져들게 했다. 그리고 얼마 후 유퀴즈에 나온 그를 봤다. 서울대 공대를 졸업하고 지휘를 하려고 동 대학에서 다시 음악을 전공했다고 했다. 상상할 수 없었던 길이었다. 사람의 인생이 하나의 길로만 정해질 수 없다는 걸, 그의 열정이 증명하고 있었다. 남편과 엄마, 동생까지 데리고 그의 오케스트라 공연을 보러 갔다. 열정을 사람으로 만든다면, 아마 그가 될 것이다. 나도 그처럼 살고 싶었다. 그때 공연에서 느꼈던 감동이 다시 가슴 깊이 차올랐다.


벌써 퇴사한 지 4개월이 넘어가는 시점이라 남편에게 물었다.


"내가 재능도 없는데, 괜히 글 써보고 싶다고 객기 부리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어."

"선영아, 글 쓰는 모든 사람들이 스스로 재능 있다고 자부하면서 글을 쓰는 게 아닐지도 몰라."


그래서 나는 서울 페스타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채널의 백윤학 지휘자 영상을 틀어놓고 다시 단편을 쓰기 시작했다. 영상에서 뿜어져 나오는 그의 열정을 따라, 그의 지휘에 맞춰서 초고를 완성할 수 있었다. 브런치에 발행하는 것 외에 별도로 작업한 결과물이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퇴고의 길은 멀지만, 나는 느릴 뿐 못하진 않는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나는 내 길을 걸어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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