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3이 되자 아이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상급학교 진학을 앞둔 중학교 마지막 해, 반(班) 배정과 함께 새로운 학급에서 만난 아이들은 대부분 낯선 얼굴들이었다. 한 학년이 10개 학급이라 1, 2학년 때 같은 반이었을 경우보다 그렇지 않았을 경우가 확률적으로 높기도 하고, 새 학년 반 배정의 원칙에 성적이 반영되었기에 낯익은 얼굴을 다시 만나기란 쉽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중3의 1학기 첫날, 아이들의 마음속에는 저마다 비상한 각오가 움트고 있었다. 공부를 잘하는 아이는 잘하는 아이대로, 그렇지 못한 아이는 그렇지 못한 아이대로 유종(有終)의 미(美), 네 글자에 대한 간절한 바람이었을 것인데, 그것을 진중(鎭重)한 목소리로 날마다 일깨우는 사람이 있었다.
#담임 선생의 학급 조회 어록
담임 선생은 70명을 넘나드는 아이들을 찬찬히 훑어보며 중3의 마음가짐을 강조했고 그런 모습은 학급 조회(朝會) 시간 때마다 반복됐다.
‘공부해라, 공부해서 남 주나,’ ‘지금 공부 안 하면 나중에 후회한다.’
담임 선생의 훈시(訓示) 어록(語錄)은 단순하면서 변함이 없어 일관성이 있는 듯했으나 듣는 아이들에게는 맨날 똑같은 잔소리로 돌아올 수 없는 메아리가 돼 귓등으로 흘려보냈을 뿐인데도, 사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담임 선생의 초지일관(初志一貫)에 맞선 아이들의 태도도 초지일관했다. 담임 선생이 아이들의 속마음을 알고, 아이들이 담임 선생의 속마음을 알았더라도 양쪽 입장은 변하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중3 때 우리 반 수업 광경. <사진=계성중 68회 졸업 앨범>
#은밀한 그룹 과외 제안
그렇게 중3의 하루하루가 지나던 1학기 어느 날, 학급 친구 한 명이 뜻밖의 말을 전해왔다. 담임 선생의 제안이라고, 소규모 그룹 과외를 받을 아이 다섯 명을 구하는데 의사가 있냐고 물어온 것이다. 담임이 가르치는 과목은 영어라 영어 개인과외를 말하는 것일 텐데, 나에게는 두 가지 측면에서 의아하게 들렸다.
하나는 담임이 자기 반 아이들을 상대로 비공개적으로 개인과외 대상을 물색한다는 은밀성이 찜찜했고, 또 다른 하나는 순전히 개인적인 연유(緣由)에서였다. 팔불출(八不出) 같은 소리지만 중3 당시 나는 고1 영어 과정을 홀로 익히고 있을 때라 담임 선생의 뜻을 굳이 수용해야 할 이유가 없었고, 이때까지 개인과외나 학원 강의는 받아본 적도 없고 관심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 말고 또 한 명의 친구도 나와 같은 입장이었는데 담임 선생이 의도한 소규모 그룹 과외는 결국 무산됐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됐다. 본의(本意) 아니게 전령사 역할을 한 아이만 난처하게 되고만 셈인데 이 또한 담임 선생에게 귀책 사유가 있을 것이 분명해 나로서는 이래저래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고 그 뒤로도 개운치 않은 기분이 가시지 않았다.
#잠재된 이상징후
담임 선생도 전령사 아이를 통해 사태의 전모(全貌)를 눈치챘을 것이라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고울 리는 없었을 텐데도 이상징후는 발견되지 않았다. 당시에는 개인과외가 합법적이라 굳이 비선(秘線)을 통해 학생을 모집할 까닭이 없었지만 담임 선생의 체면상 대놓고 직접 나서기에는 내키지 않아 벌어진 일이 아닐까, 여겨진다.
내가 중고등학교 시절, 대구 지역에는 영어와 수학 과목에서 널리 알려진 교사들이 여럿 있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학원가가 아닌 일선 학교에 일타(1등 스타) 강사들이 포진하고 있었던 셈이다. 송구스럽지만 중3 때 담임은 소위 스타 강사도 아니고 교수법(敎授法)이 남달랐던 것도 아니었다.
#이상징후의 낌새
까맣게 잊고 있었던 이상징후의 낌새는 아주 우연한 상황에서 전혀 생뚱맞은 모습으로 갑자기 나타났다. 이상징후의 발단은 우리 반 반장의 일탈에서 비롯됐다. 당시에는 월례고사나 중간고사, 기말고사 채점을 담당 교사가 소속된 학급의 반장이 일부 도맡는 경우가 있었고 이 과정에서 일어나면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
우리 학교는 교사연구실이라고, 교사들이 자유롭게 연구와 교무(敎務) 및 행정 업무를 볼 수 있는 독립된 개인 공간을 갖추고 있었다. 담임 선생 대신 우리 반 아이들의 답안지 채점을 매기던 반장은 자기 외에 아무도 없는 교사연구실이라는 비밀 보장 공간이 내미는 유혹에 흔들려 결코 해서는 안 될 몹쓸 짓을 저지르고 말았다. 자기 답안지의 내용을 부정한 방법으로 수정해 스스로 점수를 상향 조정한 것인데 그룹 과외 제안을 거절한 나와 또 다른 친구에게 발각되고 만 것이다.
평소 반장의 영어 실력을 익히 알고 있던 나와 또 다른 친구는 공개된 채점에 의구심이 들어 반장의 답안지를 유심히 들여다본 결과 부자연스러운 수정 흔적을 발견했고, 우리의 추궁에 대해 반장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석연찮게 얼버무려 부정행위를 사실상 시인한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발각된 반장의 일탈과 느닷없는 봉변
다음날 반장의 어머니가 느닷없이 학교에 나타났고 얼마 후 담임 선생의 호출로 나와 또 다른 친구는 교무실로 불려 갔다. 예기치 못한 봉변을 직감한 우리는 솥뚜껑처럼 큰 담임 선생의 손바닥으로 따귀 한 대씩을 얻어맞는 날벼락에 억울함과 분한 마음을 참을 수 없었지만 끝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180cm를 넘는 큰 키의 담임 선생은 손도 정말 컸다. 담임 선생의 일방적이고 부당한 즉결 처분에 대해 우리는 그룹 과외 제안을 거절한 일이 원인이라 생각했는데 사실 여부를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다음 시험부터 반장이 채점하는 일은 더 이상 없었고 그날 이후 반장의 영어 점수는 평소 자기 실력과 다르지 않았다. 반장의 일탈을 묵인한 담임 선생의 행동은 어른답지 못했고, 스승의 도(道)를 저버렸다는 씁쓸함을 뒤로하고 나와 그 친구는 우리의 길을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