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 시절 풍속사(風俗史)
24. 영문법 정복과 공부 맷집 기르기
영문법 정복과 공부 맷집 기르기
#생애 첫 자기주도학습, 중2 겨울방학
중학교 2학년 겨울방학 첫날, 독하게 마음먹었다. 영문법 정복과 공부 맷집 기르기, 스스로 다짐한 겨울방학 양대 과제를 16절지에 큼지막한 글씨로 적어 책상 위 벽에 붙였다. 공책에 일일 계획, 주간 계획, 월간 계획표를 따로 작성하고 날마다 학습 실적을 점검해 나갔다.
공부다운 공부를 한번 해보자고 결심한 마당에 아예 끝장 승부를 볼 각오로 생활 양식을 단순화했다. 학습 의지를 흐리게 할 외부와의 접촉 자제, 이동시간 절약, 하루 10시간 이상 책상에 앉아 있기, 주 6일 공부 하루 휴식 등으로 축소 지향적인 행동반경을 설정했다.
#축소 지향적인 행동반경
공부 장소를 집으로 한정하고 방학이 끝날 때까지 친구와 연락하지 않기로 외부와의 단절을 선언했다. 학습 공간을 집으로 못 박은 것은 이동에 따른 시간 낭비를 줄이고 불필요한 외부 노출에서 돌출될 수도 있는 학습 방해 요소를 원천 봉쇄할 의도에서였다.
집에서 공부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소음과 같은 특별한 환경적 걸림돌이 없다면 집만큼 공부하기 좋은 곳도 없다. 삼시세끼 어머니의 손맛과 정성이 듬뿍 담긴 집밥을 아무 때나 마음껏 먹을 수 있다는 점도 내 집만의 장점이었다.
추운 겨울, 웃풍이 센 기와집의 특성상 책상 주변에서 몰려드는 냉기(冷氣)에 손발이 시려오는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잠을 쫓고 머리를 차게 해 공부 신경을 예리하게 벼릴 수 있는 학습 효과 측면에서 아랫목보다 책상은 확실한 비교우위에 있었다.
#장기레이스 작전
과욕은 금물이라고, 두 달간 꾸준하게 달려야 할 장기레이스에서 성공적인 마침표를 찍기 위해서는 속도 조절과 힘 조절이 필요했다. 6일간 학습 에너지를 쏟아붓고 하루는 무조건 쉬었다. 쉬는 날도 친구를 만나는 대신 집 마당에서 홀로 테니스공 벽치기, 축구공 차기, 줄넘기 따위로 체력을 관리하고 TV도 보고 좋아하는 책을 읽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타고난 기질이 엉덩이에 뚝심이 있고 혼자 지내는 것을 잘 견디는 편이라 하루 종일 집에 있어도 바깥세상이 궁금하지 않았다.
학습 리듬은 50분 수업, 10분간 휴식이라는 학교 수업 시간을 참조하되, 가속도가 붙었을 때는 쉬지 않고 전진하기도 했다. 늦은 밤, 사방에 정적이 감도는 무렵이면 온전히 공부에 전념할 수 있었고, 머리가 맑아 활자와 문장에 대한 이해도도 빠르고 높았다.
#메들리 삼위일체
내가 선택한 영어 교재는 원조 스타 강사 안현필 선생(1913~1999)이 해설을 달아 번역한 메들리 삼위일체. 삼위일체는 일본 학생들을 위해 영국인 메들리(A. W. Medley)가 지은 영어 학습 교재로 1950년대부터 국내에 번역 소개됐는데 안현필 편역(編譯) 삼위일체가 가장 유명했다.
삼위일체는 영어실력기초, 영어기초오력일체(五力一體)와 함께 안현필 선생의 3대 베스트셀러로 이름을 날렸다. 영어실력기초는 500만 부 넘게 팔린 초대형 베스트셀러다.
삼위일체는 영어 학습의 기초는 문법이라고 방점을 찍은 문법, 해석, 작문 세 줄기로 구성된 고등학생용 교재인데, 문법을 알아야 영어를 잘할 수 있다는 안현필 선생의 서문(序文)에 솔깃해 과감하게 도전했다. 애초 영문법 터득을 위해 결정한 터라 문법 내용을 집중적으로 공부했고 해석과 작문 부문은 수박 겉핥기식 마음 내키는 대로 발췌독(拔萃讀)했기에 큰 무리는 없었다. 2학년 학기 중에 영어실력기초를 일독(一讀)한 것도 큰 도움이 되었다.
#안현필의 잔소리
아직도 기억나는 대목이 몇 있는데 대강 이랬다. 자칭 ‘안현필의 잔소리’다.
-문법의 기본문형을 확실히 숙지하고 영어의 밑천인 어휘 암기와 함께 어휘가 들어간 예문은 입에서 무의식적으로 나올 때까지 통째로 외워라.
-중요 어구나 문장을 소리 내 읽고 꼭 필사(筆寫)하는 습관을 들여라.
-단어와 숙어를 하루 일정량씩 외우되 문장 속에서의 맥락을 파악해라.
-반복, 또 반복 학습을 해 지식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 중학교 교과서를 눈여겨보면서 영어의 뿌리를 다져라.
-사전을 가까이 두고 친구나 애인처럼 대해라.
특이한 것은 영어 학습 방법과 학생이 가져야 할 마음가짐은 물론 교재 중간중간에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는 영어 격언을 소개하면서 자신만의 독특한 해설을 곁들이거나 격려성 발언을 첨부해 공부하는 학생들이 지루하지 않도록 배려한 점이다.
#코앞으로 다가온 중3 1학기와 성문기본영어의 출간
1976년 말에서 1977년 2월까지 질주한 영문법 정복 레이스는 별 차질 없이 무난하게 끝났다. 두 달간 끼고 살았던 영한사전에도 손때가 덕지덕지했다. 거무스름한 사전의 몸빛에는 추위를 견디며 전력투구한 하루하루의 잔영이 내려앉아 있었다.
엉덩이 뚝심도 세지면서 공부 맷집에도 자신감이 생겼다. 스스로 기획하고 성취한 생애 첫 자기주도 학습이었다. 기분이 좋았다.
코앞으로 다가온 중3 1학기가 기대됐다. 1977년은 성문기본영어의 출간으로 성문 영어 시리즈가 완성되면서 중등 영어 교재시장의 지각변동이 본격화한 해다. 안현필 신화에도 금이 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