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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권 Mar 01. 2024

학창 시절 풍속사(風俗史)

37. 80년대 초 고속버스 풍경

80년대 초 고속버스 풍경     


#처음 타 본 고속버스

 초등학교 3학년이던 1971년, 처음으로 고속버스를 탔다. 여름방학 때였다. 9살 꼬마인 나는 둘째 사촌 누나를 따라 서울 첫째 사촌 누나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고속버스를 가까이에서 눈으로 직접 본 것도 처음이었고 고속버스를 탄 것도 이때가 처음이라 모든 게 신기했었다. 3형제의 막내로 누나가 없던 나에게 사촌 누나는 친누나나 다름없었다.     


사촌 누나가 표를 끊어 오자 나는 대기 중이던 고속버스에 올라탔다. 고속버스는 시내버스보다 덩치가 컸고 실내도 넓었다. 지정좌석제라 내 자리에 가 앉자 푹신한 좌석이 밑으로 쑥 내려가 내 몸도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시내버스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안락한 승차감이었다.     


좌석마다 호출 버튼이 달려 있었고 창문 가리개용 커튼과 책이나 신문을 읽을 수 있는 독서등(讀書燈)도 설치돼 있었다. 모두 다 처음 보는 것들이었다.      


#사라진 동대구고속버스터미널

 고속버스터미널은 동대구역 아래쪽에 있었다. 그때 고속버스는 1970년부터 운행을 시작한 한일 고속, 천일 고속, 그레이하운드 등이 있었다. 내가 탄 버스는 한일 고속 아니면 천일 고속 둘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파격적인 이층(二層) 버스로 버스 안에 화장실이 따로 있었던 그레이하운드 고속버스는 탄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1972년 한진 고속이 터미널을 개장하면서 동대구고속버스터미널 시대가 열렸으며 금호 고속(1974년), 중앙 고속(1976년), 동양 고속(1982년) 터미널이 뒤를 이었다. 4개 고속버스의 터미널은 각기 따로 독립적으로 운영되던 중 2016년 12월 동대구복합환승센터의 오픈과 함께 폐쇄됐다. 지하 6층, 지상 5층 규모의 동대구복합환승센터 3층에서 동대구 역사(驛舍)로 연결되는 통로가 있다.     


4시간쯤 달린 고속버스가 도착한 곳은 용산 시외버스터미널이었다. 1971년 당시 서울의 고속버스터미널은 도심 여러 군데에 분산돼 운영됐다. 버스업체마다 터미널이 다 달랐고 용산에도 있었고 동대문에도 있었고 다른 곳에도 있었다. 흩어져 있던 서울 시내 고속버스터미널은 1976년 하나로 통합된 뒤 1981년 10월 신축 개장했다. 서울성모병원 건너편 지금의 서울 고속버스터미널이다.     


201612월 폐쇄된 한진 고속버스 동대구 터미널. 안우석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고속버스 안내양

 처음 탄 고속버스 안에서 잊히지 않는 장면이 하나 있었다. 단발머리에 곱게 화장한 고속버스 안내양 누나였다. 목이 말라 호출 버튼을 누르면 안내양 누나가 플라스틱 컵에 담긴 물을 건넸다. 안내양 누나는 운전석 건너편 좌석에 앉아 있다가 수시로 고속버스 안을 왔다 갔다 했다. 일어설 땐 좌석을 접고 일어서고 앉을 땐 좌석을 펴고 앉는 접이식 의자였다.     


사촌 누나는 안내양 좌석 옆 적십자 마크가 새겨진 흰 구급상자 속에는 간단한 상비약도 들어있다고 말해주었다. 안내양 누나는 한 번씩 안내방송을 했고 버스 천장에 달린 여닫이식 환풍구를 열어 환기를 시키기도 했다.


안내방송의 내용은 목적지와 운행 소요 시간, 도착 예정 시간, 경유 휴게소 소개 따위였다. 나는 목이 마르지도 않은데도 호출 버튼을 두어 번 눌렀고 그럴 때마다 안내양 누나는 환하게 웃으며 예쁜 포장지로 싼 사탕을 손에 쥐어주었다.      


 흡연과 금연의 구분이 없을 때라 버스 안 승객들은 어느 자리에서건 아무 때나 담배를 태웠다. 80년대 들어 흡연석과 비흡연석 자리가 따로 구분됐고 흡연석은 버스 뒤쪽으로 몰려 있었다.     


70, 80년대 고속버스 안내양은 젊은 여성들이 선호한 인기 직종(職種)이었다. 용모 단정하고 고졸 이상의 학력을 갖춰야 하는 고속버스 안내양은 경쟁률도 치열했고 처우(處遇)도 괜찮았다. 고속버스 회사별로 안내양들이 착용하는 제복은 색상과 디자인에서 차이가 났을 뿐, 모두 다 투피스 정장(正裝) 차림이었다.      


#고속버스 안 승객들의 모습

승객들은 장시간 운행하는 고속버스 안에서 무료한 시간을 때울 요량으로 각자 나름의 방책을 세웠다. 홀로 탄 젊은이들과 아저씨들은 주간지나 신문을 읽다가 꾸벅꾸벅 졸았고, 아주머니들은 끼리끼리 수다를 떨었고 군복을 입은 군인들은 마른오징어를 안주 삼아 맥주를 마셨다. 경유 휴게소 도착 안내방송이 나올 때까지 늘어지라 잠만 자는 사람도 있었고, 목적지에 도착할 때쯤에야 부스스 눈을 뜨는 승객도 있었다.      


 약 4시간이 소요되는 동대구~서울, 서울~동대구 노선은 대개 추풍령 휴게소 또는 금강 휴게소에서 한 차례 정차했다. 휴식 시간은 15분으로 승객들은 화장실을 다녀오거나 호두과자 따위의 간식거리를 사서 먹거나 갖고 탔다. 버스 출발시간이 지났는데도 나타나지 않는 승객 때문에 버스 기사와 안내양이 애를 태우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고속버스와 통일호

 고속버스는 대학 다닐 때 많이 탔다. 기차보다 덜 복잡하기도 했고 서서 갈 염려도 없었고 시간도 아낄 수 있어서였다. 8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고속도로가 막히는 일이 없어 동대구~서울, 서울~동대구 코스는 3시간 30, 40분이면 주파했다. 학생이라 운임이 비싼 새마을호는 탈 수 없었고 통일호를 타면 4시간이 걸렸는데 그마저도 이런저런 이유로 지연되는 일이 다반사였다.      


고속버스터미널 매표창구 앞은 늘 표를 사려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새치기를 둘러싼 실랑이도 심심찮게 벌어졌고 반환표라도 구하고자 줄 옆에서 초조하게 지켜보며 기다리는 사람들도 많았다.      


 대학 입학 후 한두 달에 한 번꼴로 대구에 내려갔다. 추석 명절 연휴 때는 고속버스표를 구하기가 어려워 향우회(鄕友會)에서 대절(貸切)한 전세버스를 이용한 적도 있었다.      


#고속버스 속 헛된 기대심리

 고속버스를 혼자 자주 타 본 사람은 다 아는 막연한 기대심리에 관한 이야기 한 토막. 지정된 좌석에 착석하고 옆자리가 비어 있다는 것을 알고 나서부터 헛된 욕망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욕망은 현실을 이길 수 없는 것일까. 혹시나 했다가 역시나, 하고 실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마음속 옆자리 인물상이야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을 텐데 인기척이 날라치면 십중팔구 내 복(福)에 무슨, 하고 신기루 같은 헛된 꿈에서 깨 낙담하곤 했다. 인기척의 실체는 대개 연세 지긋한 어르신이나 중년의 아저씨, 어깨가 떡 벌어지고 펑퍼짐한 아주머니 또는 또래의 남자였다.      


#맥주와 고속버스

 맥주 때문에 고속버스 안에서 낭패를 본 경험도 있다. 전작(前酌)에 취해 발동이 걸린 친구와 자리에 앉자마자 부어라 따라라 맥주를 마시다가 아랫배에서 묵직한 신호가 사정없이 울려 곤욕을 치렀었다. 휴게소에 도착하려면 30분이나 남아 둘 다 용을 쓰고 난리를 떨며 죽을힘을 다해 솟구쳐 오르는 배출 욕구를 가까스로 억눌렀던 기억이 생생하다.      


서울 고속버스터미널의 현재 모습.

Sharon Hahn Darlin  https://www.flickr.com/photos/sharonhahndarlin/52796374673/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옛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 대한 기억

아득한 옛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 대한 기억도 그대로 살아 있다. 80년대 초 강남고속버스터미널 경부선 대합실(待合室) 바깥 건물 2층에 ●●다방(茶房)이라는 커피숍이 있었다. 동대구행 고속버스표를 끊고 탑승 시간이 남으면 꼭 들르는 곳이었다.      


그때는 커피숍을 다방이라고 불렀다. DJ가 뮤직박스 안에서 음악을 틀어주는 음악다방 전성기 시절이었다. 강남고속버스터미널 다방은 뮤직박스가 없이 널따란 홀 구조의 대형 커피숍이었다.     


휴가를 나왔거나 휴가 끝나고 귀대하는 군복 차림의 현역 군인들도 터미널 다방에서 자주 볼 수 있었다. 군인들이 터미널 다방에 나타나면 가끔 흥미진진한 광경이 펼쳐졌다. 군인들과 관할구역 순찰 업무 중인 헌병(憲兵)들 사이에 신경전이 벌어지곤 했는데 놓칠 수 없는 볼거리였다.      


#휴가 나온 군인과 헌병(憲兵)의 실랑이

 우연히 실제 장면을 목격한 적이 있었다. 어인 일인지 홀로 순찰에 나선 헌병이 너덧 명의 군인들에게 휴가증을 요구하면서 시비가 붙었는데 군인 중 한 명이 돌연 헌병의 헬멧을 벗겨 잡고선 멀리 휙 집어던져 버린 것이었다. 당황한 헌병은 뭐라고 씩씩대면서 바닥에 나뒹군 헬멧을 주우러 갈 수밖에 없었고, 그 사이 군인들은 줄행랑을 쳐버렸다.     


몸의 일부인 헬멧을 챙기느라 어쩔 수 없이 군인들을 추적할 수 없었던 헌병은 자존심이 상했을 것이고 지켜보는 사람들은 차마 소리 내어 웃을 수는 없어 웃음을 참는 시늉을 하다가도 터져 나오는 웃음을 어쩔 수 없었다. 80년대 국군 장병들이 드나드는 시내 곳곳에서는 헌병들과 군인들 간의 기(氣) 싸움이 일상적으로 벌어졌다.

    

#통일호 열차를 놓친 기억

 대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 있었던 일도 잊을 수 없다. 대구 모 대학에 재학 중이던 고등학교 친구와 술을 마시다가 서울행 마지막 통일호 열차를 놓쳐 다음 날 새벽 고속버스 첫 차를 탄 적이 있었다. 기차 출발시간이 한참 남아 동대구역 근처 잔디밭에서 소주와 마른오징어로 대작(對酌)을 하기 시작했었다. 속전속결로 소주 병나발을 불던 친구는 아니나 다를까 몸을 가누지 못하고 쓰러져 버렸다.      


기차 출발시간은 임박했고 친구는 술이 깰 기미가 없었다. 에라 모르겠다, 하고 택시를 잡아타고 친구를 집 입구까지 바래다준 뒤 동대구역으로 돌아왔지만, 기차는 이미 떠나고 없었다.      


 추억은 추억일 뿐이지만 고속버스는 지금도 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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