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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권 Mar 08. 2024

학창 시절 풍속사(風俗史)

39. 천태만상(千態萬象) 교수 강의법

천태만상(千態萬象) 교수 강의법     


#기억에 남는 교수의 두 유형

 대학교 강의와 관련해 기억에 남는 교수는 대개 두 부류다. 강의를 잘하는 교수이거나 강의가 별로인 교수. 하나를 덧붙인다면 학점이 짠 교수도 그럴 것이다. 강의 내용의 호불호와 상관없이 강의실 분위기가 유별났던 강의도 기억의 한구석을 차지할 만하다고 할 수 있겠다. 명강의에 인상적인 강의실 풍경까지 더해지면 교수 이름 석 자가 화석처럼 기억에 오래 남아 있을 것이다.     


강의를 잘하는 교수는 말솜씨가 유려한 교수, 유익하고 흥미진진하게 강의하는 교수, 논리 정연하고 분석적인 교수, 카리스마 넘치는 강의로 학생들을 휘어잡는 교수를 꼽을 수 있다.


강의를 못 하는 교수로는 강의가 지루하고 재미없는 교수, 강의 주제와 상관없는 말만 늘어놓는 교수, 교재 내용을 읽다시피 하는 교수, 공연히 화를 잘 내는 교수에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데도 열변을 토하는 교수가 포함될 것이다. 학계 평판은 뛰어난데, 기대와 달리 강의는 별로인 교수도 있었다. 이런 교수는 학점도 짜기로 악명이 높았다.     


#실력과 명성에 카리스마까지 겸비한 교수

 학계에서 알아주는 금융경제통으로 강의 실력도 남다르고 범접할 수 없는 카리스마까지 겸비한 인기 교수가 있었다. 프린스턴대 박사 출신으로 서른한 살 때 모교 교수로 부임한 이분의 명성은 학생들에게도 소문이 나 있었고 나도 귀동냥으로 들어 알고 있었다.     


2학년 1학기 때로 기억한다. 금융경제 전공인 이분이 경제학 개론 강의를 맡는다는 소식에 만사 제쳐두고 수강 신청을 했다. 선배들에게 전해 들은 이분 강의의 특징은 네 가지였다. 배울 것이 많다, 수업 분위기를 흐리면 심하게 혼난다, 학점 인심이 가혹하다, 성적에 반영되는 돌발적인 벼락 퀴즈에 시달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대학 졸업식 때 모습.


*경제학 개론 강의실 풍경

경제학 개론 첫 시간, 듣던 대로였다. 강의실 뒤편에서 속닥거리는 소리가 나자, 40대 초반의 교수는 버럭 고함을 지르며 야, 거기 떠드는 놈 나가! 라고 호통을 쳤다. 꾸벅꾸벅 조는 학생이 눈에 띄면 손에 쥔 분필을 집어던졌고 분필로도 분이 안 풀리면 분필 지우개를 투척하기도 했다.


강의실 분위기는 늘 긴장감이 돌았다. 경북 상주(尙州) 출생인 교수는 일찍 서울로 올라온 탓인지 말투에 사투리는 묻어나지 않는 대신 말이 빠르고 중간중간 말을 더듬는 버릇이 있었다. 강의를 전개하는 방식이 논리 정연했고 말로는 다 채울 수 없는 설명은 도식(圖式)을 곁들여 이해를 도왔다.      


눈매가 매섭고 강직한 인상이었으나 고어(古語)풍의 우스갯소리도 잘해 나름의 유머 감각도 있었다. 가령 어린 여자아이를 등에 업고 지나간다, 는 표현을 여아(女兒)를 척추에 적재(積載)하고 보행(步行)한다고 했고, 오늘은 봄바람이 많이 불어 봄날 같지 않다, 는 금일(今日)은 춘풍(春風)이 산재(散在)해 불사춘(不似春)이 따로 없다고 하는 식이었다. 내가 지어낸 말이 아니라 실제 강의에서 교수가 했던 말이다.     


 경제학 개론은 용어 정리와 일정한 수학적 지식이 필요한 수식(數式)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경제원리를 파악하는 게 관건이라 쉽지 않은 과목이었다. 누구보다 이런 사정을 잘 알고 있었을 교수는 중요 대목을 두 번 세 번 반복하면서 강조했고 삼단논법(三段論法)이나 귀납법적(歸納法的) 사례를 들어 학생들의 이해를 도왔다.     


*공포의 돌발 퀴즈

카리스마 넘치는 강의 스타일만큼이나 교육 방식도 열정적이라 수강 열기가 높았다. 강의 시작 시간이 됐는데도 교수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조교가 등장하면 학생들은 아이고 오늘 또 죽었네, 하고 머리를 감쌌다. 강의가 돌발 퀴즈로 대체된다는 신호였기 때문이다.      


돌발 퀴즈는 예고 없이 치르는 약식 시험이었다. 학업 성취도를 즉흥적으로 테스트해 지속적인 면학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한 것이었을 텐데 기습적인 시험이라 학생들 모두 곤혹스러워했다. 퀴즈 횟수는 유동적이었고 학기 말 성적에 반영됐다.     


경제학 개론 수업은 만만찮은 체감 난이도(難易度)에다 학점도 까다로웠지만 개괄적인 경제 흐름을 보는 눈이 뜨임으로써 사고의 도약을 이루게 된 소중한 기회였다. 3학년 때는 교수의 전문 분야인 금융경제학도 수강했었다.      


 역대 정권 개각 때마다 하마평(下馬評)이 무성했지만, 관운(官運)과는 인연이 없는지 끝내 입각(入閣)하지는 못했다.      


#시니컬한 강의, 정치사상사

 정치사상사를 가르친 교수는 시니컬한 강의로 유명했다. 영어 원서 3권이 한 한기 교재였고 논술형 중간고사와 기말고사에 단 한 문제만 출제돼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 있다. 해박한 식견(識見)을 강의 곳곳에서 느낄 수 있었고 독설(毒舌)에 가까운 비평이 전매특허(專賣特許)였다.     


강의 중 기억에 남는 교수의 언중유골(言中有骨) 비유 하나를 소개하자면 이렇다.      


(두꺼운 벽돌 책인 원서 교재를 들여다보면서) …여러분, 아마도 이 책을 끝까지 다 읽은 사람은 조판공(組版工), 한 명뿐이었을 것입니다. 조판공은 원고를 인쇄할 활자로 된 인쇄판을 짜는 기능공으로 직업상 어쩔 수 없이 책 속의 모든 글자를 봤을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자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교재의 분량이 워낙 방대하고 내용이 까다로워 통독(通讀)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과 바로 그런 이유로 훌륭한 정치사상 교과서라는 점을 에둘러 강조한 게 아니었을까, 짐작된다.     


#청산유수(靑山流水) 강의와 분석적 강의

 한국 정치론 강의도 명강의였다. 청산유수처럼 달변(達辯)에 다변(多辯)에다 말의 속도도 아주 빨라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강의 내용을 소화할 수 없을 정도였다. 박학다식(博學多識)한 교수법(敎授法)에 매료된 학생들로 강의실이 늘 꽉 찼다.     


 3학년 땐가, 우연찮게 수강한 사회학 개론 강의도 인상 깊었다. 정교한 틀을 이용한 분석적인 해석이 공감을 자아냈고 개별적이고 특수한 사례에서 일반적인 원리를 도출하는 기법을 익히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됐었다.      


 반면, 특정 주제를 심층적으로 다루는 각론(各論) 과목인데 포괄적이고 일반적인 강의로 일관한 교수도 있었다. 주로 비화(祕話)나 야사(野史)를 장황하게 소개한 뒤 강의 끝 무렵에 가서야 본연의 주제를 설명하는 식이었다. 비교 정치론이 그랬다.     


#명성 따로 강의 따로인 교수

국제정치이론 담당 교수는 해당 분야 석학으로 알려졌는데 정작 강의는 흡인력이 없어 실망스러웠다. 시시콜콜한 신변잡담(身邊雜談)이나 하나 마나 한 이야기를 잔뜩 풀어놓기 일쑤였고 강의 방식이 단순 주입식이라 흥미를 느낄 수 없었다. 전공필수 과목이라 전원 수강할 수밖에 없었는데 찬바람이 쌩쌩 부는 학점관리 방식 때문에 다들 혀를 내둘렀던 기억이 생생하다.     


#낭독 기계인 교수

교재만 읽어 내려가는 교수도 있었다. 행정법이나 행정학은 가뜩이나 주제가 무겁고 따분해 수업 몰입도가 떨어지기 쉬운데 기계적인 낭독만 되풀이해 수강 자체가 괴로웠고 결강(缺講)한 적도 많았다.     


#기이한 심리학 강의실 풍경

 선택 과목인 심리학 수업은 강의실 풍경이 기이했다. 툭하면 교수가 대놓고 학생에게 망신을 주는 일이 잦았는데 매번 그 학생이라 의아했다. 사연인즉 교수는 학생의 수강 태도를 문제 삼았는데 무슨 말만 하면 자꾸 혀를 찬다며 화를 내 수업 분위기가 냉각되곤 했었다.      


생각해 보면 일면식(一面識)도 없었을 교수에게 그 학생이 무슨 저의가 있었을 리 만무했을 것이고, 일부 오해의 소지가 있었더라도 그저 본인의 무의식적인 습관일 뿐이었을 텐데 굳이 고의에서 비롯된 불량한 버르장머리로 과잉 해석한 결과가 아닌가, 싶다.     


  40여 년 전 캠퍼스 시절을 떠올리다가 더듬어 본 천태만상 교수법(敎授法)에 대한 단상(斷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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