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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권 Mar 12. 2024

학창 시절 풍속사(風俗史)

41. 초원(草原) 다방(茶房)의 추억

초원(草原다방(茶房)의 추억     


#정문 맞은편의 지하 다방

 대학교 정문 맞은편에 학생들의 사랑방 구실을 한 다방 하나가 있었다. 정문 바로 앞으로 난 횡단보도(橫斷步道)를 건너면 오른쪽으로 간판이 보였는데 초원 다방이라는 이름이었다. 다방 이름이 왜 초원인지는 알 길이 없지만, 안으로 들어갔을 때, 작명(作名)이 이해될 만도 했다. 다방은 투박한 원형 그대로의 시멘트 계단을 밟고 아래로 내려간 지하 1층에 있었다.      


다방 내부는 확 트인 벌판처럼 넓고 환했다. 초원이라는 이름이 잘 어울렸다. 음악다방이 대세인 시대라 초원 다방에도 뮤직 박스가 있었다. 디스크자키가 따로 없이 안이 훤히 보이는 통유리 뮤직 박스 안에는 LP(Long Play) 레코드판이 벽면을 빼곡히 채웠다. 어림짐작으로 수천 장은 돼 보였다.     


#다방 커피

 홀이 크고 손님이 많아 아가씨 둘이 주문을 받고 커피를 날랐다. 주문은 테이블에서 앉은 채로 했고 주방에서 끓인 커피를 손잡이가 달린 도자기 잔에 담아 컵 받침에 받쳐 내왔다. 


이 시기의 커피는 지금과 달랐다. 설탕과 크림을 각자 알아서 기호에 맞게 타서 즐겼다. 티스푼으로 설탕과 크림 둘 다 떠 넣어 마시거나 설탕만 추가해 마시기도 했다. 테이블마다 설탕통과 크림 통이 따로 놓여 있었다. 옛날 음악다방 시대의 커피는 다 그랬다.     


실내외를 막론하고 마음대로 담배를 피울 수 있던 때라 테이블 위에는 늘 스테인리스 재떨이와 삼천리 표 사각 성냥갑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업소 맞춤형으로 주문한 홍보용 성냥도 유행할 때였다.      


#업소 맞춤형 홍보용 성냥과 성냥개비의 쓰임새

 5cm 내외 크기로 길쭉한 직사각형 모양의 성냥갑에 업소 이름과 전화번호가 새겨져 있는데 디자인이 예뻐 음악다방에 갈 때마다 따로 수집하는 사람도 많았다. 나도 대학교 3학년 때 서울 시내 음악다방과 레스토랑의 홍보용 성냥갑을 1년 이상 모았었는데 대략 100여 개쯤 됐던 것 같다.      


성냥개비는 담뱃불을 부칠 때 말고도 쓰임새가 있었다. 성냥개비를 반으로 툭툭 부러뜨리며 무료한 시간을 보내거나 재미 삼아 동료들과 성냥개비 많이 쌓기 내기를 하는가 하면 성냥개비로 수학 연산(演算) 게임을 즐기기도 했다. 연산 게임은 여러 개의 성냥개비를 테이블 위에 늘어놓은 뒤 한 개 또는 두 개의 성냥개비를 이동시켜 일정한 등식(等式)이나 도형을 먼저 만들면 이기는 즉석 퀴즈였다. 


#초원 다방의 홀 서빙 아가씨 

 초원 다방의 홀 서빙 아가씨들은 인기가 많았다. 한 명은 새침한 깍쟁이 스타일의 갸름한 미인이었고 다른 한 명은 볼살이 약간 오른 동양적 외모로 후덕하게 생겼다. 깍쟁이 아가씨에게는 수작을 거는 학생들이 적지 않았고 그럴 때마다 쌀쌀맞은 대꾸만 돌아왔을 뿐 소득이 없었지만, 날마다 똑같은 모습이 반복됐다.     


후덕한 생김새의 아가씨는 인상처럼 말투도 상냥하고 살가워 학생들과 허물없이 농담을 주고받았다. 한동안 보이지 않던 이 아가씨를 어느 날 신촌 음악다방의 성지(聖地)로 이름난 곳에서 우연히 만난 적이 있었다. 긴가민가하던 차에 단박에 나를 알아보고 먼저 말을 걸어와 깜짝 놀랐었다. 일터를 옮긴 지 얼마 되지 않았다며 반가워한 그 아가씨의 모습에도 어느덧 40여 년이라는 세월의 흔적이 묻어 있을 것이다.     


 초원 다방은 81년 당시 대학교 정문 근처의 유일한 다방이었다. 정문에서 가깝기도 하고, 신촌 로터리까지 400m 이상 걸어 내려가야 음악다방들이 몰려 있어 초원 다방은 늘 학생들로 북적였다.      


#프로복싱 중계

 프로복싱 세계 타이틀전이 벌어지는 날에는 ‘오늘 ●●시 WBA · WBC 웰터급 통합 세계 타이틀전 생중계!!!’ 라는 매직으로 쓴 안내문이 지하로 내려가는 다방 계단 입구 벽에 붙어 있었다.      


프로복싱의 인기가 하늘을 찌를 때라 다방 안은 TV 중계를 시청하는 사람들로 만원을 이뤘고 화끈한 장면이 나올 때마다 함성과 박수 소리가 다방 바깥으로 새어 나왔다. 라운드 중간 1분 휴식 시간마다 사람들은 부리나케 자리를 비웠는데 급하게 화장실을 찾는 사람들이었다.      


82년 가을 정문 오른편에 신축 건물이 들어섰고 이 건물 반(半)지하에 아카데미 다방이 오픈하면서 초원 다방의 인기도 한풀 꺾였지만, 신입생 때의 추억이 적지 않게 간직된 곳이라 이후에도 변함없이 찾았었고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장소였다.      


 대학 초년병 시절의 향수에 잠기다 생각난 만남의 장소, 초원 다방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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