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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권 Mar 11. 2024

학창 시절 풍속사(風俗史)

40. 지정좌석제와 FA(Failure of Absence) 제도

지정좌석제와 FA(Failure of Absence) 제도     


#개강 첫날 정해진 강의실 좌석배치표

 대학 시절 모교에서만 시행한 독특한 제도가 둘 있었다. 하나는 초중고 교실처럼 강의실 내 고정된 자기 자리가 있다는 것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결석에 따른 자동 낙제(落第) 학사(學事) 내규(內規)였다.     


대학 강의의 특징 중 하나를 꼽으라면 강의실에 도착하는 순서대로 마음에 드는 자리를 골라 앉는 자유로운 착석(着席) 풍습일 것이다. 희한하게도 모교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개강 첫날 정해진 자리에서 학기 내내 수강하는 방식의 지정좌석제를 채택하고 있었다. 대학 후배인 아들이 학교에 다닐 때도 지정좌석제의 전통은 그대로였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지정좌석제의 특징으로는 개강 당일 한 학기 동안 수강할 자리가 정해진다는 것이다. 강의실에 학생들이 모두 다 착석하면 그 자리가 자기 자리였고 학기가 끝날 때까지 그대로 유지됐다. 학생들은 첫 강의 때 일체형 책걸상 모서리에 적힌 좌석 번호와 학번, 이름을 적어 조교에게 제출했다. 과목 담당 조교는 이를 토대로 학생들의 이름이 적힌 좌석배치표를 작성했다.      


#출석 점검의 전권(全權)을 쥔 조교(助敎)

지정좌석제의 또 다른 특징은 출석 점검을 교수 대신 담당 조교가 했다는 것이다. 다른 대학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지정좌석제를 시행한 이유는 학생들의 출결 상황을 엄격히 관리해 학사관리에 만전(萬全)을 다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출석 점검이 끝나고 강의실을 나가버리는 이른바 출튀(출석 점검 후 튀어 버리기)에 대한 예방책도 마련돼 있었다. 조교가 출석 체크를 하는 시간대(時間帶)는 순전히 조교의 의지에 달려있었다. 좌석배치표에 따라 빈자리를 확인하는 식이라 이름을 부를 일도 없어 조교가 강의실에 언제 나타날지는 조교만 알고 있었다.


조교는 강의 시작 직후나 강의 중간 또는 강의 종료 직전에 슬그머니 강의실 뒷문으로 들어와 결석 여부를 체크하고는 나가버려 학생들은 끝까지 자기 자리에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대리 출석

 강의를 빼먹는 방법이 하나 있긴, 했으나 위험천만한 모험이나 다름없었다. 이름하여 대리 출석으로 자기 자리에 다른 학생을 앉히는 것인데 적발되면 대리 출석에 연루된 둘 다 F 학점 처리라는 중징계를 받았다.


학교 측에서도 대리 출석의 유혹에 빠질 수도 있을 학생들의 일탈 가능성을 잘 알고 있던 터라 노련한 조교들을 동원해 색출하는 시도를 수시로 했다. 대리 출석 적발자 명단은 교내 게시판에 공지됐고 그런 일은 학기 중 심심찮게 일어났다.     


#결석 누적에 따른 낙제

 모교는 또 과목별로 결석허용 최대치를 학칙으로 정해 엄격하게 학사관리를 했다. 세칭(世稱) 공포의 FA(Failure of Absence) 제도로 결석에 의한 낙제, 즉 성적 불량이 아니라 결석 횟수 누적이 F 학점의 원인으로 성적표에 FA라고 기재됐다.     


FA는 학사관리 규칙에 따라 과목별 결석 인정 횟수를 초과하면 자동으로 낙제 학점이 부여되는 제도였다. FA의 올가미를 피할 수 있는 결석허용 마지노선은 주당 강의 횟수의 두 배였다. 예를 들어 주 3회 강의의 경우 한 학기 동안 일곱 번 결석하면 FA로 처리됐고 주 2회 강의는 다섯 번 결석 시 성적표에 FA가 찍혔다.      


#게시판에 공지된 FA 경고 대상자와 FA 확정자 명단

결석허용 마지노선에 걸린 FA 경고 대상자와 FA 확정자 명단은 교내 게시판에 공지됐다. FA 경고 대상자 명단까지 적시한 것은 F 학점을 모면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경고를 학생들에게 환기할 목적이었을 것이다. FA 경고 대상자로만 그치면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를 합산한 성적대로 학점을 취득할 수 있었다.     


#인맥을 통한 FA 면죄부

 인맥과 인정에 기대 FA 제도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있는 최후의 방법을 시도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출석 점검의 전권(全權)을 쥔 과목 담당 조교에게 선처를 호소하는 것인데 평소 친분이 두터운 조교와 호형호제하는 학생들이 주로 그랬다. 대개 고등학교 선후배이거나 이런저런 이유로 끈끈한 유대 관계를 맺어온 사이에서 통했다.     


조교만 모른 채 넘어가면 성공 확률이 100%이긴 하나 학칙에 반(反)하는 부당한 일이라 청탁한 학생이나 청탁을 수락한 조교나 양심의 가책(呵責)까지 지울 수는 없었을 것이다. 고백하건대, 나도 4학년 때 누나처럼 따르던 조교에게 읍소해 FA 면죄부를 받은 적이 있었다.      


학기마다 FA 확정자는 적지 않게 공지됐다. 고등학교 1년 선배도 FA 제도에 무더기로 발목이 잡히는 바람에 1학년을 끝으로 학사 제적됐다는 소식을 입학 직후 첫 동문 모임에서 들었다.      


#이중 학습 안전장치, 지정좌석제와 FA 제도

 지정좌석제로 모범적인 출결 관리 풍토를 조성하고 FA 제도로 결석에 따른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한 셈인데 두 제도 모두 학생들의 면학(勉學) 분위기 고양(高揚)을 위해 고안한 이중 학습 안전장치라고 할 수 있겠다.      


지정좌석제와 마찬가지로 FA 제도도 모교의 전통으로 굳건히 계승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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