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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권 Mar 14. 2024

학창 시절 풍속사(風俗史)

42. 디스코텍 우산 속

디스코텍 우산 속     


#신촌 디스코텍의 성지(聖地), 우산 속

 1981년, 신촌 로터리에 상호(商號)가 3음절인 디스코텍이 있었다. 춤과 노래의 향연(饗宴)이 벌어지는 장소치고는 이름이 단순하고 평범하면서도 특이했다. ‘우산 속’. 업소 성격이 우산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점과 업소명이 명사가 아니라는 점이 다소 생뚱맞으면서도 친숙한 뉘앙스를 풍긴다는 점에서 기억하기 쉬운 이름이었다.     


바야흐로 디스코의 시대였다. 현란하고 화려한 사이키 조명이 눈부시게 돌아가고 귀청이 터져나갈 듯이 쿵쾅거리며 울려 퍼지는 음향(音響) 속에서 청춘남녀들은 각자의 방식대로 몸을 흔들어 댔다. 70년대를 풍미한 고고 음악의 시대를 밀어내고 새로운 댄스 문화의 상징으로 떠오른 디스코 음악의 산실, 디스코텍은 그 시절, 젊은이들의 해방구였다.     


#청춘들의 막춤

청춘들은 족보 없는 몸놀림인 막춤에 몸을 맡기고 잠시나마 시대와 일상의 시름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빠른 템포의 경쾌하고 신나는 디스코 음악에 취해 몸 가는 대로 아무렇게나 추는 막춤은 우스꽝스럽고 어설펐지만 남의 눈 따위를 의식할 필요도, 이유도 없었다.     


손가락을 공중으로 내지르는 손가락 찌르기와 4분의 2박자 리듬에 맞춰 양발을 차례대로 앞으로 내밀었다, 제자리로 옮겨 놓는 기계적인 다리 동작은 막춤의 대표적인 형태였다. 숫기라고는 지지리도 없어 그저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하염없이 애꿎은 손뼉만 죽으라 치는 숙맥들보다는 그래도 나았다.      


80년대 초 ELO의 공연 장면. TyrystorELO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디스코텍의 난놈

 디스코텍에서 빼놓을 수 없는 눈요깃거리도 있었다. 흰색 셔츠 차림의 젊은 남성 한 명이 홀연히 나타나 입이 떡 벌어지는 댄스 실력으로 순식간에 무대를 장악해 버릴 때였다. 디스코텍에서는 춤 잘 추는 사람이 장땡이라고, 세련된 춤사위와 화려한 율동을 자유자재로 선보이는 남성을 관객들은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어딜 가나 난놈은 있는 법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럴 것이다. 프로 댄서가 무색할 만한 남성이 펼치는 몸동작 하나하나에는 절도가 배어 있었고 그가 연출하는 춤의 세계는 예술적 감흥을 불러일으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단숨에 디스코텍의 주인공 자리를 꿰찬 남성 주위로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밤을 뜨겁게 달구는 청춘들의 열기는 식을 줄을 몰랐다. 발 디딜 틈 없이 북적대는 디스코텍 안에서는 몸과 몸이 부딪히기 일쑤였고 이름 모를 선남선녀(善男善女)들은 서로의 발을 밟고 밟히면서도 미안해하거나 싫어하는 내색을 하지 않았다.      


 디스코텍에 갈 때면 누구나 은근히 혹시 오늘은 옆자리를 채워줄 멋진 상대를 만나게 될 수 있을까, 하는 기대에 부풀기 마련이었고, 대개 그런 행운은 혼자만의 짝사랑으로만 끝날 뿐, 끝내 찾아오지는 않았다. 혹시나, 했다가 역시나, 하고 야속하게 사그라지는 기대와 실망의 도돌이표는 달라질 듯하다 가도 달라지지 않아 숱한 청춘들의 속을 태웠다.     


#기다림의 시간, 블루스 타임

시끌벅적한 디스코텍의 실내 풍경에 숨이 턱 밑까지 차오를 때쯤이면 180도 다른 새로운 분위기가 눈앞에 펼쳐졌다. 이른바 블루스 타임이라고 부르는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사방팔방으로 맹렬하게 휘젓고 할퀴던 사이키 조명의 드센 기세가 순해지고 고막이 터질 듯한 사나운 음향 박동도 얌전해지면서 플로어는 블루스 짝을 찾으려는 남성들과 뿌리치려는 여성들의 움직임으로 부산해지기 시작했다.     


디스코텍 실내를 천천히 휘감아 도는 조명발의 위력은 만만하게 볼 게 아니었다. 은은한 불빛에 비친 파트너의 얼굴은 포토샵 보정을 한 것처럼 달떠 보였고 감미로운 블루스 음악에 공연히 마음이 흔들리기까지 해 심리적 방어 태세를 스스로 놓아버리기 십상이었기 때문이다.     


ELO의 여덟 번째 정규 앨범 Discovery 커버. 1979년에 발표된 앨범으로 Midnight Blue, The Last Train to London 등의 곡이 수록돼 있다.


#Midnight Blue

 80년대 초 디스코텍을 장악한 독보적인 블루스곡은 Midnight Blue였다. 영국 출신의 7인조 록 밴드 ELO(Electric Light Orchestra)가 79년에 발표한 여덟 번째 앨범 Discovery에 수록돼 공전(空前)의 히트를 기록한 블루스 음악의 대명사다. ELO는 클래식에 록을 접목한 실험적 음악을 개척한 밴드로도 유명하다.     


4분이 조금 넘는 러닝 타임으로 울적한 밤에 사랑하는 연인을 그리워하는 애잔한 마음을 노래한 Midnight Blue는 블루스 타임이 되면 어김없이 흘러나왔다. 전자 음악과 현악기의 유려하면서 부드러운 선율이 심장을 두드리는 드럼 비트와 어우러져 빚어내는 꿈속을 거니는 듯한 몽환적인 분위기가 뭇 남녀들의 마음을 사뭇 들뜨게 했다.     


 I see the lonely road that leads so far away, 라는 첫 소절 멜로디의 인상이 강렬해 생면부지(生面不知)의 남녀라도 의기투합할 확률이 낮지는 않았다.      


에릭 클랩턴(1945~)이 1977년에 발표한 소프트 록 음악, Wonderful Tonight도 블루스 타임의 단골 노래였다.      


2014년 런던 하이드 파크에서 공연한 ELO의 리드싱어이자 원년 멤버인 제프 린의 모습. Paul Carless https://www.flickr.com/photos/paulcarless/15241046415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디스코 음악의 상징, The Last Train to LondonBorn to be Alive

 1981년 디스코텍 우산 속을 주름잡았던 대표적인 디스코 음악, The Last Train to London도 ELO가 부른 노래다. 짜릿한 전자음(電子音)의 박진감과 흥겨운 댄스 비트로 폭발적인 인기몰이에 성공한 가운데 음악성도 인정받은 ELO의 대표곡이다. 사랑하는 연인을 두고 떠나야 하는 애절한 마음을 주제로 Midnight Blue와 함께 Discovery 앨범에 수록된 곡이다.      


1979년 전 세계적인 히트곡이 된 Born to be Alive도 디스코 음악으로 명성을 떨쳤다. 미국 음반 시장에서만 100만 장 이상 판매된 밀리언 셀러를 기록한 이 노래는 프랑스 가수 패트릭 에르난데스(1949~)가 불렀다.      

미국의 록 밴드 제이 게일스 밴드(J. Geils Band)가 부른 Come Back과 Centerfold도 디스코 음악 전성기를 이끈 명곡이었다. Come Back은 1982년 빌보드 싱글 차트 Hot 100에 5주간 1위를 차지한 노래다.      


 80년대 초 디스코텍 우산 속에서는 대중 가수들의 라이브 공연을 볼 수 있는 날도 있었다. 우산 속은 지금의 2호선 신촌역 6번 출구 옆 5층 건물 꼭대기에 있었다. 우산 속은 없어졌지만 우산 속 건물은 리모델링 작업을 거쳐 아직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세월은 흘러도 추억은 남는다. 사라진 신촌 디스코텍 우산 속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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