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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권 Mar 19. 2024

학창 시절 풍속사(風俗史)

44. 하숙촌(下宿村) 오디세이 ②하숙생 구인(救人) 광고

하숙촌(下宿村) 오디세이 하숙생 구인(救人) 광고     


#전봇대의 쓰임새

 지금은 있는지조차 잘 모르는 전봇대의 쓰임새가 많았던 때가 있었다. 남자아이들이 우악스럽게 힘을 발산하는 골목길 놀이, 이른바 말타기가 벌어지는 장소이기도 했고, 늦은 밤 취객(醉客)들이 잠시 실례를 범하는 곳이기도 했다. 덩달아 다음 날 주인을 따라 그곳을 지나가던 강아지들도 후각을 간지럽히는 익숙한 자극이라는 이유만으로 마음에도 없는 영역 표시의 몸짓으로 코를 킁킁거리곤 했었다.     


숨바꼭질의 기준점이 되는 베이스캠프이기도 했고, 각종 홍보물 스티커로 홍수를 이루는 24시간 열린 게시판이기도 했다. 전봇대의 둥근 나무 몸통 둘레는 늘 무단광고물로 빼곡히 도배됐고, 광고물 위를 또 다른 광고물이 올라타 몇 겹씩 덧붙여져 있었다.      


#무단(無斷)광고의 종류

무단광고는 종류도 다양했고 스티커 형태가 많았다. 이를테면 중국집 선전 스티커나 연탄배달 스티커, 난방용 기름배달 스티커, 아르바이트생 모집 스티커, 열쇠집 스티커, 솜틀집 스티커, 얼음집 스티커, 급전(急錢) 융통을 홍보하는 일수(日收) 광고 스티커에다 심지어 떼인 돈을 받아준다는 심부름센터 스티커까지 볼 수 있었다.

    

 하숙생 구인(救人) 광고도 전봇대의 힘을 빌렸다. 다른 무단광고와 달리 스티커 형태가 아니라 백지(白紙)에 손 글씨로 쓴 공고문 형식이었다. 골목길 담벼락이나 하숙집 대문에도 하숙생을 환영한다는 구인 쪽지가 붙어 있었는데 그 내용은 대략 이랬다.     


‘하숙생 구함, 연락처 ●●●-▲▲▲▲’, ‘하숙생 환영, 독방 있음, 전화 ■■■-◆◆◆◆’


지방에서 올라온 하숙생들은 다 이런 방법으로 하숙집을 구했고 요즘처럼 부동산 업소 문을 두드릴 필요가 없었다. 이미 하숙 생활 중인 친구나 선후배들의 소개로 입주하는 일도 적지 않았다.     


#하숙집 입주 계약의 전모(全貌)

 하숙집 입주는 하숙생과 집주인이 직접 만나 구두로 입주 날짜를 정하면 계약이 성사됐다. 계약서를 따로 작성하지 않았기에 계약 종료일도 없었고 하숙방을 빼는 것 역시 구두로 통보하면 그만이었다. 입주일 기준으로 매달 한 달 치 하숙비를 선불로 냈고 보증금은 없었다.      

 

어리숙한 시절에 벌어진 주먹구구식 거래 방식이었지만 쌍방 간의 신의가 뒷받침됐기에 구두계약만으로도 뒤탈이 없었다. 대학생과 하숙집 주인 사이에 이루어진 하숙방 입주 계약에는 일종의 정(情)과 믿음이라는 따뜻한 정서가 깔려 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      


#합판 위에 벽지를 바른 하숙방 벽()

하숙방을 둘러싼 사기 계약 따위는 없었던 시절이었고 대신 하숙방과 방 사이의 소음 문제가 골칫거리라면 골칫거리였다. 1984년 대학교 4학년 1학기 때 실제로 겪었던 일이다. 신촌 로터리 노고산 언덕의 한 하숙집에 들어갔을 때다. 짐을 다 옮기고 방 청소를 하는데 옆 방에서 나는 소리가 내 방에서 나는 소리처럼 들려 깜짝 놀랐다.      


이상하다 싶어 벽을 두드리니 벽이 아니라 합판을 대고 벽지를 바른 것이었다. 주인아주머니에게 알릴 수밖에 없었고 다행히 하숙비를 환불받았다. 기존 주택을 하숙집으로 급조하는 과정에서 이런 일은 종종 벌어졌고 방음(防音) 문제는 하숙생이 입주 전 꼼꼼하게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복덕방의 풍경

 8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부동산 업소는 오늘날 부동산 중개사무소의 전신(前身)이랄 수 있는 복덕방(福德房)이었다. 공인중개사 제도가 도입되기 전이라 복덕방이라는 이름의 부동산 중개업소가 곳곳에 널려 있었다. 복(福)과 덕(德)을 주고받으며 나누는 장소라는 멋스럽고 운치가 있는 명칭답게 복덕방을 둘러싼 풍경 안팎에도 여유가 넘치고 예스러웠다.      


복덕방은 어르신들이 장기와 바둑을 두는 소일거리 공간이자 정보교류의 장이었다. 부동산을 소개하고 거래가 성사된 대가로 치르는 중개비도 복비(福費)라 불렀다. 복비는 거래 성사에 대한 고마움을 표시하는 수고비의 다른 이름이라 술값이나 담뱃갑 수준으로 치르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흥정을 붙여 주고 대가로 받는 구전(口錢)이라고도 했다. 법정(法定) 중개수수료가 없던 시절이라 가능한 일이었다.     


복덕방의 근거는 1961년에 제정된 소개영업법(紹介營業法)과 소개영업법 시행령에 따른 신고제라 관할 관청에 신고만 하면 누구나 가게를 차려 영업할 수 있었다.     


#부동산 거래 시장의 변화

 70년대 들어 대규모 개발 붐에 편승한 부동산 투기 풍조가 만연하면서 부동산 거래 질서 확립을 위한 법제화의 여론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마침내 1983년 부동산중개업법이 제정되고 공인중개사 제도가 도입되면서 부동산 거래 시장에도 대대적인 변화가 찾아왔다.      


1984년 4월부터 부동산 중개업이 신고제에서 허가제로 변경된 데 이어 1985년 제1회 공인중개사 시험과 함께 6만여 명이 넘는 공인중개사들이 등장하면서 어르신들의 사랑방 구실도 하던 복덕방 시대도 저물기 시작했다.      


#신촌 일대 하숙촌

 방학 때는 하숙생들이 고향으로 내려가고 없어 하숙 방을 놀려야 했다. 일부 하숙집에서는 방이 비어 있는 방학 기간에 하숙방 관리비 명목으로 일정액을 요구하기도 했으나 그런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대학들이 밀집한 신촌 일대 하숙촌은 신수동과 대흥동, 창천동과 연희동, 노고산동과 대현동 부근에 몰려 있었다. 신촌 기차역 주변으로 여학생 전용 하숙집도 드문드문 있었다. 남학생과 여학생 모두에게 입주가 허용된 하숙집도 없지는 않았으나 여학생들이 꺼리는 바람에 하숙생 모집에 애를 먹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원룸 시대에 하숙생 구인 광고는 더는 볼 수 없는 광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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