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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권 Mar 22. 2024

학창 시절 풍속사(風俗史)

46. 하숙촌(下宿村) 오디세이 ④하숙집 풍경

하숙촌(下宿村) 오디세이 하숙집 풍경      


#화려했던 신촌 로터리 상권(商圈)

 80년대 초, 신촌 로터리 일대는 핫 플레이스였다. 백화점과 상급 종합병원, 서점, 쇼핑센터, 재래시장, 영화관, 음악다방과 레스토랑, 디스코텍, 음식점, 유흥주점, 호프집, 액세서리 가게, 의류 및 화장품점이 대거 몰려 있었다. 로터리를 중심으로 인근에 유명 사립대학들이 자리한 덕분에 늘 젊은이들로 북적였고 종로와 더불어 강북지역을 대표하는 상권(商圈)이자 번화가로 명성을 떨쳤다.     


강남과 강북을 넘나드는 버스 노선의 발달과 80년 10월 일부 구간 개통을 시작으로 84년 도시 순환 2호선 전철이 최종 완성되면서 사통팔달(四通八達)의 교통 요지로 자리매김했다. 젊음의 거리, 신촌 주변 풍경의 또 다른 특징 중 하나로 빼놓을 수 없는 게 있었는데 바로 대규모 하숙촌이다.     


#신촌 일대 하숙촌

 원룸 시대가 도래하기 훨씬 전인 그 시절, 서울로 유학(遊學)을 온 지방 출신 대학생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하숙 생활을 했고 하숙집 주인들은 넘쳐나는 하숙생들로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연세대생들은 창천동과 연희동, 노고산동, 조금 멀리는 서교동까지 하숙방을 구하러 다녔고, 서강대생들은 신수동과 대흥동 일대에 밀집한 하숙집을 찾아다녔다. 이화여대생들은 주로 대현동과 노고산동의 하숙집에 머물렀다.     


#무보증에 선불(先拂)인 하숙비

신촌 일대의 하숙비는 집마다 조금씩 달랐으나 보증금이 없고 한 달 치 하숙비를 선불로 내야 했으며 하루 세끼 중 점심이 제공되지 않는다는 점은 모두 같았다. 하숙집에서 삼시 세끼를 다 먹을 수 있고 세탁 서비스 혜택까지 보장되는 신림동 대학가와 달리 빨래도 손수 해결해야 하는 신촌 하숙촌의 인심은 조금 야박한 편이었다.     


#2층 단독주택

 하숙집의 건축 양식은 2층 단독주택이 일반적이었다. 하숙방의 입주 형태는 2인 1실과 독방(獨房), 두 가지였다. 대개 1층은 주인집의 주거 공간이었고 하숙생들의 방은 2층에 모여 있었다. 1층 주인집 안으로 들어가 나무계단을 밟고 2층 하숙방으로 올라가는 구조도 있었고, 대문 안에서 2층으로 바로 연결되는 별도의 시멘트 계단이 설치된 집도 있었다. 등교 시간과 귀가 시간이 들쭉날쭉한 하숙생들로서는 바깥으로 계단이 난 하숙집을 선호했다.     


거실을 사이에 둔 2층 공간의 하숙방 수는 4개 내지는 5개였다. 하숙생 전용 화장실도 2층에 따로 있었다. 혼자 사용하는 1인실은 하나뿐인 경우가 많았으나 간혹 2개를 배정하기도 했다. 하숙집 주인 입장에서는 1인실을 하나 더 늘리는 것보다 2인 1실로 운영하는 것이 수입 면에서 더 나았다.      


#1인실과 21실의 장단점

 1인실은 말이 독방이지 책상 놓고 이불 깔고 누우면 방이 꽉 차 답답했다. 룸메이트의 눈치를 볼 일이 없이, 오롯이 자기만의 공간에서 혼자만의 생활을 즐길 수 있다는 점이 장점이라면 장점이었다.     


2인 1실은 룸메이트와 공동으로 방을 사용하는 과정에서 이것저것 신경 쓸 일이 적지 않게 발생하지만, 공간적으로 1인당 면적이 독방보다 넓었다. 룸메이트와 의기만 투합되면 서로 의지하고 부대끼는 재미가 쏠쏠해 객지 생활의 외로움도 달랠 수 있었다. 이런 이유와 함께 하숙비를 아낄 수 있는 장점까지 더해 일부러 2인 1실을 선택하는 하숙생들도 많았다.     


여학생들의 편의를 위해 여대생 전용 하숙집이라는 안내문을 내건 주택도 대현동 쪽에 여러 채 있었다. 자취(自炊)하거나 친척 집에서 거주하는 여학생들도 드물지 않았다.      


#하숙비

 하숙비는 학교 정문이나 후문과의 거리가 가깝고 방이 크다거나 시설이 우수하고 쾌적하거나 지은 지 얼마 안 된 신축 건물일수록 그렇지 않은 집보다 비쌌다.


1981년~1984년 기준으로 2인 1실은 한 달에 6만~7만 원, 독방은 8만~9만 원 선이었다. 노고산동 하숙집들은 가파른 언덕이라는 불리한 입지 조건 때문에 이보다 약간 쌌으나, 아무래도 등하굣길이 불편해 하숙생들에게 그다지 인기가 없었다.      


#브리지 전화와 인터폰

2층 거실에는 1층 주인집 전화와 연결된 수신 전용 브리지 전화가 설치돼 있었다. 거실 벽면에 달린 인터폰은 식사 때를 알리거나 하숙생을 찾는 전화가 왔을 때 통보하는 용도였다. 인터폰이 따로 없는 집에서는 주인아주머니가 1층 계단 아래에서 큰 소리로 아무개 학생 전화! 또는 밥 먹으러 내려와, 라며 외쳤다.     


#식사 시간과 식사 방식

 하숙집마다 식사 시간이 정해져 있어 끼니때만 되면 하숙생들이 우르르 몰려 내려갔다. 약속된 시간이 지나면 밥상을 치우는 집이 많아 늦잠을 자는 날에는 굶거나 밖에서 밥을 사 먹어야 했다. 붙임성이 좋은 일부 하숙생들은 느지막이 일어나 동네 슈퍼에서 라면을 사 들고 와 주방에서 끓여 먹기도 했다. 1층 주방의 식탁에 모여 앉아 다 함께 식사했고 주방이 좁은 하숙집에서는 주인집 안방에 밥상이 차려졌다.     


각자 먹고 싶을 때 자유롭게 알아서 식사하게끔 자율 배식(配食)으로 하숙생들의 편의를 배려한 집도 간혹 있었다. 그런 하숙집은 1층 주방 식탁 위에 늘 반찬통이 차려져 있었다. 대형 전기밥솥에서 먹고 싶은 만큼 밥을 퍼먹을 수 있어 하숙생들이 좋아했다.


#하숙집 밥상

반찬으로는 밑반찬 외에 김치찌개나 된장찌개 따위의 찌개류가 항상 등장했고 찌개류가 나오지 않은 날에는 콩나물국이나 미역국, 나물국이 밥상에 올랐다. 어쩌다 달걀 프라이가 하나씩 놓이면 하숙생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육류로는 고추장으로 버무린 돼지고기 양념구이가 보름에 한 번꼴로 나왔는데 늘 양이 모자라 하숙생들의 불만을 샀으나 사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사나흘이나 대엿새마다 한 번씩 고등어구이를 볼 수 있었고 갈치나 삼치구이는 그보다 뜸하게 차려졌다.


 #주인아주머니와 하숙생 간의 기() 싸움

 하숙집의 난방 방식은 기름보일러가 대세(大勢)였고 찬 바람이 부는 늦가을부터 주인아주머니와 하숙생들 간의 기(氣) 싸움이 일상적으로 벌어졌다. 기름값 걱정에 한 푼이라도 난방비를 아끼려는 쪽과 조금이라도 따뜻하게 잠을 자고 싶은 쪽의 욕망은 필연적으로 부딪힐 수밖에 없었고 해결의 실마리를 쥔 주인아주머니가 언제나 승자의 편에 서 있었다.      


기온이 뚝 떨어지는 11월 하순부터 하숙생들은 온몸을 파고드는 한기(寒氣)에 밤잠을 설치기 일쑤였고 본능적으로 두꺼운 솜이불을 덮어쓰고 새우잠을 자야만 했다. 하숙집의 겨울은 추웠고 여름은 더웠다.     


 룸메이트도 아는 친구와 하숙방에서 밤새도록 통음(痛飮)한 날도 많았는데 다음날 펼쳐지는 풍경은 하숙집마다 달랐다. 주인아주머니의 인심이 후한 집에서는 기꺼이 친구 밥상까지 차려 주었고, 원칙주의를 신봉하는 집에서는 밥상은커녕 핀잔만 들을 뿐이라 마음이 불편했다.     


주인집 딸과 눈이 맞아 사귀는 일도 있고 훗날 혼인(婚姻)으로 이어지는 사례까지 있다는데 내가 하숙할 동안 그런 광경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세월이 많이 흘렀어도 하숙집에 대한 기억은 여전하나, 하숙집은 다 사라지고 없고 하숙생들도 뿔뿔이 흩어져 소식조차 알 수 없다는 생각에 새삼 그때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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