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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권 Mar 27. 2024

학창 시절 풍속사(風俗史)

48. 하숙촌(下宿村) 오디세이 ⑤하숙비와 용돈을 다 털어먹은 대형사고

하숙촌(下宿村) 오디세이 하숙비와 한 달 치 용돈을 다 털어먹은 대형사고      


#하숙생들이 기다리는 날

 하숙생들이 오매불망 기다리는 날이 있었다. 고향 집에서 하숙비와 한 달 치 용돈을 부쳐오는 날이면 하숙생들의 얼굴에 화색(和色)이 돌았다. 은행 창구에서 하숙비와 용돈을 출금(出金)하는 순간,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불렀고 거나하게 한잔할 생각에 미소(微笑)가 떠나지를 않았다.      


한 달간 쓸 용돈을 거머쥐고 나면 나처럼 술을 좋아하는 하숙생들은 은근히 객기를 부리고 싶은 나머지 들뜬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평소에는 꿈도 못 꿀 맥주를 마음껏 마시며 객지 생활에서 오는 외로움과 스트레스를 날려버릴 그럴듯한 술자리 계획을 짜느라 즐거운 고민에 빠지기 십상이었다.      


빠듯한 용돈을 쪼개고 쪼개 아껴 쓰느라 늘 선술집에서 변변찮은 안주에 막걸리나 소주잔만 기울이다 이날만큼은 호기롭게 한 턱을 톡톡히 내며 자기도취에 한껏 취해 버리는 것이다.     


#하숙생들이 유혹에 빠지는 날

 용돈이 지갑에 두둑이 채워지는 날은 그래서 언제나 유혹에 빠지는 날이기도 했다. 자칫 객기가 도를 넘어 하룻밤 사이에 용돈은 물론 하숙비까지 몽땅 다 날려버리는 초대형 사고도 일어날 수 있었는데 84년 늦은 봄 어느 날 나에게도 그런 불상사(不祥事)가 찾아왔다.     


내가 자초한 일이라 누구 탓을 할 수도 없어, 불상사라기보다는 공연한 객기가 화근(禍根)이 된 만용(蠻勇)의 대가랄 수 있겠다. 나는 술판 거사(擧事)에 참여할 대작(對酌) 파트너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등학교 3년 선배이자 경영학과 복학생 선배를 점찍었다. 호탕한 성격에 술을 밥처럼 떠받드는 선배와 나는 죽이 잘 맞는 둘도 없는 술친구였다.     


#술친구인 고등학교 3년 선배

술을 자주 마시는 애주가 습관이나 술자리가 무슨 마라톤 경주라도 되는 것처럼 한 번 마셨다, 하면 뿌리를 뽑고 마는 장기전(長期戰)을 선호하는 스타일까지 닮아 하루가 멀다, 하고 어울려 술집을 찾아다녔다.      


 모름지기 모든 일에는 첫 단추가 중요한 법. 우리는 해거름에 목돈이 생기면 가끔 갔던 신촌 로터리 근처의 맥줏집을 찾아 술판 거사의 실행(實行) 보따리를 풀기 시작했다. 없어서 못 먹는 프라이드치킨 한 마리와 골뱅이무침을 안주 삼아 1,000cc짜리 생맥주잔을 부딪치면서 오늘의 대미(大尾)를 장식할 메인이벤트를 무엇으로 할지를 궁리했다.     


일단 맥줏집 바로 옆 젊음의 해방구로 소문난 디스코텍 우산 속으로 자리를 옮겨 몸과 취기(醉氣)를 달군 뒤 최종 결정을 내리기로 했다. 주머니 사정이 든든해서인지 그날따라 술이 술술 넘어갔고 흥겨운 음악 소리에 취하고 술에 취하면서 젊은 혈기의 배포도 부풀 대로 부풀어 올랐다.      


#거사(擧事) 장소, 방석집

 알코올 기운과 겁 없는 호기(豪氣)가 의기투합하면서 마침내 초대형 사고를 불러온 최종 선택이 실체를 드러냈다. 선배와 나는 신촌 로터리에서 지금의 경의 중앙선 서강대역 방향 언덕길에 몰려 있던 이른바 방석집에서 거사의 화룡점정을 찍기로 했다.     


산해진미로 푸짐하게 차려진 상(床)차림에다 한복을 차려입은 아리따운 도우미들이 음주가무(飮酒歌舞)로 흥을 돋우는 방석집은 술값이 고가(高價)라 하숙생들이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할 고급 음식점이었다. 가격이 1인당 얼마, 식으로 정해져 있었는데 두 명이면 당시 한 달 치 하숙비와 맞먹는 금액을 치러야 했다.     


#거사의 후유증과 유목 생활

 넘지 말아야 할 지출(支出)의 선을 넘고 만 그날 거사의 후유증은 혹독했다. 하숙비와 용돈을 술값으로 다 날린 나는 급한 불부터 먼저 끄기로 하고 하숙집 주인아주머니에게 지갑을 잃어버렸다고 사실과는 전혀 다른 말로 둘러댔는데 다행히 나의 연기가 통했던지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문제는 이제부터였다. 한 달간 잠은 어디에서 잘 것이며 끼니는 어떻게 때울 것인지 막막했지만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곧 살길을 찾았다. 일단 선배의 하숙방을 한 달간 이어질 유목 생활의 베이스캠프로 삼고 캥거루처럼 눈치껏 고향 친구와 후배들의 하숙집을 옮겨 다니며 신세를 지기로 했다.


평소 인심을 잃지 않았던지, 내가 애처로웠던지, 그들 모두 나의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여 주었다. 유목 기간에 나는 처음으로 명동 한복판에 간판을 내건 전당포(典當鋪)라는 데를 가봤다.      


#또 한 번의 거사 감행

 잠자리와 식사는 물론 담배까지 얻어 피우며 한 달을 버틴 나에게 선배는 이번에는 자기가 신세를 갚겠다며 지난번과 똑같은 방식으로 또 한 차례의 거사를 감행하기로 약속했다.


빈털터리가 된 선배는 옛 경의선 금촌역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의 한적한 농촌 마을의 방 한 칸을 싼값에 빌려 팔자에도 없는 자취를 하면서 학교에 다녔다.     


 그때의 금촌은 지금의 금촌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선배는 졸업 후 S 전자 인사팀에 입사했다. 철모르던 시절의 철없던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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