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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권 Apr 01. 2024

학창 시절 풍속사(風俗史)

50. 하숙촌(下宿村) 오디세이 ⑦신림동 하숙집

하숙촌(下宿村) 오디세이 신림동 하숙집     


#신림 9동 하숙촌

 대학 마지막 학기 때 또 한 번 하숙집을 옮겼다. 새로 이사한 곳은 신촌에서 멀리 떨어진 신림동 하숙촌이었다. 신림동 하숙촌은 옛 지명 주소로 신림 9동 대로변에서 언덕길을 따라 주택들이 밀집한 동네였다. 군데군데 하숙을 치는 집들이 몰려 있었고 일반 주택도 섞여 있었다.     


내가 입주한 하숙집은 버스가 다니는 큰길에서 안쪽으로 뚫린 넓은 골목길을 걸어 올라가야 했는데 경사가 가파른 오르막길이라 제법 숨이 찼다. 하숙집까지는 5분 정도의 거리로 언덕길 양옆으로 지나가는 택시나 승용차를 피해 다니느라 늘 붐볐다. 하숙집은 널찍한 골목길 옆으로 난 작은 골목 안 2층 단독주택이었다.     


1층은 주인집, 2층은 하숙생들의 공간인 전형적인 하숙집 구조를 갖췄고 마당은 따로 없었다. 대문 안에서 2층 하숙방으로 바로 올라갈 수 있는 철제 계단이 놓여 있었다. 하숙방은 1인실 하나를 포함해 모두 4개였고 화장실도 딸려 있었다.     


#신림역 주변의 이색 주점

등굣길이나 하굣길 교통편은 지하철이 편리하고 빨라 늘 버스를 타고 2호선 신림역에서 지하철로 갈아탔다. 신림역 주변은 지금처럼 그때도 번화했고 유흥업소와 숙박업소가 한데 어우러져 밤에도 대낮처럼 환한 불야성(不夜城)을 이뤘다.     


신림역 유흥업소 중 대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이색적인 주점(酒店)도 있었다. 칸막이를 친 부스 형태의 방 여러 개를 갖춘 특이한 구조였는데 대학생들의 핫 플레이스로 이름이 나 다른 지역에서 일부러 찾아오는 원정 고객도 적지 않았다.     


640ml짜리 병맥주와 마른안주 또는 과일 안주가 기본 세트 메뉴로 나왔고 부스 안에서 벌어지는 풍경은 청춘들의 호기심을 해소하는 데에 부족함이 없었다. 죽이 잘 맞는 친구 두셋이 모여 취기(醉氣)가 오르면 누군가가 꼭 바람을 잡았고 그 바람이 바람으로만 끝나는 날은 없었다.     


#고등학교 단짝 친구

 내가 전철과 버스를 바꾸어 타는 번거로움을 마다하고 신림동으로 하숙방을 옮긴 이유는 단 하나, 고등학교 단짝 친구 때문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한 반이 된 인연으로 둘도 없는 사이가 된 그 친구와는 대학이 달랐지만 틈만 나면 붙어 다녔다.


내가 친구의 하숙집으로 놀러 가거나 친구가 나의 하숙집으로 찾아오는 일이 빈번했고 종로 2가 먹자골목을 내 집 드나들 듯이 했다. 방학 때도 이틀이 멀다, 하고 대구 동성로 젊음의 거리를 쏘다녔고 미운 정 고운 정이 다 든 절친 중의 절친이라 할만했다.      


4학년 여름방학 때, 그 친구의 제안으로 84년 8월이 끝나갈 무렵 용달차에 하숙 짐을 싣고 신림동 하숙촌으로 떠났다. 마침 친구의 룸메이트가 다른 하숙집으로 떠나는 바람에 친구나 나나 새로 방을 알아볼 필요도 없었다.      


#신림동 하숙촌의 전통

 신림동 하숙촌의 분위기는 신촌과 달랐다. 점심이 제공됐고 세탁 서비스까지 하숙비에 포함됐다. 하숙방에 놀러 온 친구들 밥까지 살뜰히 챙겨주는 후한 인심은 신림동 하숙촌의 오래된 전통이었다. 후덕한 외모답게 주인아주머니는 휴일이면 주전부리로 삶은 고구마를 갖다주기도 했고, 냉장고에 채워 놓은 아이스크림을 건네는 배려도 아끼지 않았다.      


하숙집 주변에 고등학교 동기 몇 명도 살고 있어 왕래가 잦았고 신림동 먹자골목에서 소주잔을 기울이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절친과는 한 방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대학가 하숙촌의 불문율과 달리 학기가 끝날 때까지 우려할 만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수수께끼 같은 광경

수수께끼 같은 광경도 목격했다. 부산 출신으로 독방(獨房)을 쓰고 있던 이국적으로 생긴 대학원생 이야기다. 어느 날 대학원생의 친척 동생이라는 여대생 한 명이 하숙집으로 놀러 왔었다. 억센 부산 사투리 말투가 오빠를 빼닮아 그런가 싶었는데 다음 날 아침 깜짝 놀라는 일이 벌어졌다.     


대학원생의 방문을 열고 나온 친척 동생과 마주친 친구와 나는 순간 이게 뭐지, 하며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정작 친척 동생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하게 우리에게 눈인사를 보내며 지나갔고 대학원생도 마찬가지였다.     


그 후로도 대학원생의 친척 동생은 한 번씩 하숙집에 찾아왔고 그럴 때마다 대학원생 방에서 하룻밤을 자고 갔다. 친구와 나는 남매지간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고 연인 사이가 확실할 거라고 짐작만 했을 뿐, 더 이상 물을 수가 없었다. 있을 수 있는 일일 수도 있었겠지만, 친구와 내 눈에는 희한하고 이상한 모습으로 비쳤다. 대학원생의 친척 동생이 아닐 수도 있었을 그 여대생은 신촌의 모 여대에 재학 중이었다.     


#취중(醉中) 전철에서 벌어진 황당한 일

 이런 일도 있었다. 얼큰하게 취해서 귀가하던 전철 안이었다. 선 채로 가방을 들고 손잡이에 몸을 의지하고 있었는데, 취기(醉氣)에 나도 모르게 깜빡 선잠이 든 것이었다. 덜컹거리는 전철 안에서 서 있는 상태로도 잠을 잘 수 있다는 사실을 이때 처음 알았다.      


육중한 쇳덩어리의 집합체인 전철은 출발할 때와 정지할 때, 곡선 선로(線路)로 진입할 때마다 서 있는 승객들의 몸을 흔들어 댔고 내 몸도 예외일 수 없었다. 그때마다 감겨 있던 눈은 아주 짧은 순간 떠지는가 싶다가 이내 다시 스르르 감기고 말았다.     


비몽사몽(非夢似夢)의 잠기운은 내리고 타는 승객들이 나를 밀치는 가운데서도 용케 깨어나지는 않았고 스스로 지쳐 본능적인 자각(自覺) 기능을 흔들어 깨울 때쯤에서야 비로소 눈을 뜰 수 있었다.      


이때쯤이면 안타깝게도 대개 내려야 할 역을 지나치기 일쑤였고 그 사실을 인지하면서 놀라움은 황망함이 되어 끈질기게 달라붙던 취중의 잠을 저 멀리 쫓아냈다.     


#성내역 사건

 황당한 상황이 전철이 끊기는 시간에 발생한다면 막막한 감정에 눈앞이 캄캄해질 수밖에 없는데 나에게도 그런 일이 한 번 일어났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도착한 역은 신림역에서 무려 10여 개의 역을 지나친 성내(城內)역이었다.


내선 순환이고 외선 순환이고 전철은 더 이상 다니지 않았다. 성내역은 2010년 8월 9일 역명(驛名)이 지금의 잠실나루역으로 바뀌었다. 호주머니에 일체 여윳돈이라고는 없던 내가 어떻게 신림동 하숙집까지 갈 수 있었는지는 상상에 맡기겠다.   

   

 내가 겪었던 일은 요즘도 날마다 누군가에게 벌어지는 지하철 2호선의 일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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